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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영근 시인의 삶과 작품세계

입력 : 2006-05-13 15:35:00 수정 : 2006-05-13 15: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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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노동 가난과 절망에 한평생 울다 허망히 가다 지난 11일 저녁 박영근(사진) 시인이 술과 노동, 가난과 절망, 그리고 시를 붙들고 살다가 48세로 절명했다. 사인은 영양실조와 결핵성 뇌수막염과 패혈증이었다.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전주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서울에 올라와 노동자로 살다가 1981년 ‘반시’ 제6집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취업공고판 앞에서’ ‘대열’ ‘김미순전’ 이란 시집들을 펴낸 시인이다. 그는 타고난 서정으로, 구호가 아닌 서정으로 노동의 질곡과 애달픔을 시로 써왔다. 한국 현대문학 최초의 노동자시인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 그는 술로 죽었지만, 달라진 시대와 부박한 문단, 좌절된 사랑 때문에 술을 마셨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점 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길’)
박영근은 고층빌딩이 늘어선 틈바구니의 허름한 인천 판잣집에서 가마솥에 물조차 끓이지 못하는 이 시처럼 이미 모든 장기가 파괴된 몸을 이끌고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백석문학상에다 신동엽창작기금까지 받은 문사의 영예를 누리며 남부럽지 않게 자존을 구가할 수 있었던 그가 왜 그리 술에 탐닉하다 허망하게 죽었을까.
모든 죽음은 허망하기에 허망은 허물이 아니지만, 그는 어쩔 수 없는 ‘노동자’로 살았는데 이른바 ‘학출’ 노동자들이 노동자들 사이에 들어와 혁명을 외치다가 세월이 달라지니 썰물처럼 빠져나가 증권회사에서 정치판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현실에 대해 절망했고, 시대와 무관하게 지속되는 ‘노동’의 시를 문단조차 철 지난 유행가로 치부하는 현실에서 ‘별 볼일 없는 노동자 서정’으로 시밖에 쓸 수 없는 자신을 자학했다.
그리하여 그는 목소리를 높였던 지난날들은 이미 가고 없고, 이제 세상은 그 시절조차 “웃으며 팔아먹고” 있을 따름이어서 “단순하게 살게 해달라고 매일매일 나에게” 애걸했고, “해동을 하는 나무처럼 목도 팔도 다리도 잘라버리고” 싶다고 썼다.
그의 사망 원인 중 하나인 ‘패혈증’이란, 말 그대로 피가 부패하는 병이다. 시인의 맑은 피를 썩게 만든 것은, 지금 우리들의 비정이요 가벼움이다. 그는 비로소 저승에 가서야 시대의 비정과 변덕을 뛰어넘어 이렇게 춤을 춘다. 몸도 마음도 아프지 않은 영원한 그곳에서.
“아플수록 몸은 눈이 밝아진다// 열에 들린 몸이/ 꼼지락거리는 나무의 발가락을 본다/ 제 속을 날아가는 흰 나비를 본다// 넋이야, 넋이야 출렁이는 피// 열꽃이 터지는가/ 온몸이 근지러워라/ 다리며 허리/ 가랑이며 자지 끝까지/ 고름이 쏟아지고/ 몸 속 가지 가지마다 숨이 열리고/ 한 숨, 한 숨 돋아나는 물방울들// 어디서 사과 익는 냄새/ 신 살구 냄새/ 물소리/ 물소리/ 달구나 거렁뱅이 바람에도/ 진한 살 냄새// 아 뜨거운 몸이/ 한 발만 내디디면/ 그대로 춤이 될 것 같은데/ 허공에 피어/ 갖은 빛깔로/ 흐드러질 것만 같은데”(‘춤’)
조용호 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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