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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준의 7080사람들]'사랑의 썰물'의 주인공 가수 임지훈

입력 : 2013-03-28 16:55:38 수정 : 2013-03-28 16:5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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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보다 더 좋은 음악 만들고 싶어요”

 

 소설가 이외수는 가수 임지훈을 가리켜 ‘지상에서 가장 슬픈 목소리를 가졌다’고 평했다. 그만큼 그의 목소리에는 우수가 어렸다. 곡은 애절하고 서정적이다. 노래를 듣다보면 왠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언제나 등장하는 하모니카는 가슴까지 아프게 한다. 그의 노래에는 후련함 따위는 애초부터 없다. 허스키 보이스는 삶의 고통을 한층 묵직하게 만든다. 우수가 한없이 어려서, 슬픔이 한없이 짙어서 우리는 그의 노래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1987년 솔로앨범 ‘사랑의 썰물’로 데뷔해 지금까지 6집의 앨범을 냈다. 그간 라이브 국내 최다 라이브 콘서트 기록(1800회)을 갖고 있다. 그만큼 그는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에 젖어 산다.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아주 많다. 1982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음악인으로의 첫 발을 내디딘가수. 6개월 동안 3장의 앨범을 발표한 경이로운 기록 보유자. 고인이 된 가수 김광석을 실질적으로 데뷔시킨 선배 가수. 100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라이브 콘서트를 연 패기 있는 가수. 수첩을 갖고 다니며 지금도 틈틈이 곡을 쓰는 작곡가. 국내 최대 규모 포크 공연인 ‘파주 포크 페스티벌’ 기획에 참여하는 공연기획가. 그는 1959년생 서울 출생으로 한양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전영록, 김수철, 최성수, 김범룡 등과 절친하다. 강상준의 7080사람들이 그를 만나러 일산을 찾았다.

-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음악을 시작한 지 30년이 지났는데 요즘엔 공연과 공연기획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년 대마도에서 일본 가수와 함께하는 ‘친구 뮤직 페스티벌’이 올해로 18번째를 맞이했는데요. 올해도 어김없이 공연을 할 계획입니다. 연차적으로 하고 있는 전국 순회공연도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말 전국 순회공연을 강원도 지역에서 했는데 올해는 부산을 시발점으로 곧 시작할 겁니다. 작은 소극장이나 중극장에서 주로 하는데 기회가 되면 대극장에서도 공연할 예정입니다.

공연기획은 3년째 파주 임진각에서 열리는 ‘파주 포크 페스티벌’을 하고 있어요. UCC 포크 경연대회도 처음으로 기획하고 있고요. 포크를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UCC를 올리면, 이를 1차 심사하고, 4월에 2차 예선, 5월 초에 본선을 개최하려고 합니다."
 
 - ‘파주 포크 페스티벌’ 기획에 대해서 말씀 좀 해주시지요.

"CBS 한용길 전 본부장하고 임진각에서 매년 진행하는 공연기획입니다. 2011년 1회 때부터 기획에 참여해 올해로 3회째를 맞이합니다. 공연할 때마다 2만5000명에서 3만명의 관중이 모이는 국내 최고 포크 공연입니다. 공연의 주제는 평화예요. DMZ(비무장지대)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벌이는 행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통일의 그날까지 임진각에서 자유를 노래하고 싶어요. 자유는 포크의 정신과 가장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행사는 지금까지 국내 가수들 위주로 공연을 했는데 앞으로는 세계적인 팝 아티스트들을 참여시키려고 합니다. "

- 대전에서 음악 방송을 진행하신다고 들었는데.

"대전MBC에서 ‘임지훈의 산책’이라는 콘서트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두 번 내려가서 녹화하고 있어요. 벌써 1년가량 됐네요. 7080 가수 위주로 녹화를 진행하고 있어요. 처음보다 프로그램의 질이 많이 좋아졌어요."
 
- 가수 임지훈 하면 역시 ‘사랑의 썰물’인데, 그 노래는 어떻게 탄생했나요.

"1987년에 가수 김창기 씨가 찾아왔어요. 여자 친구랑 헤어졌다고 같이 한 잔 했죠. 김창기씨가 여자친구랑 헤어진 이야기를 글로 써서 곡을 붙였다고 들려줬어요. 조금 수정을 해야 할 것 같아서 각자 수정을 해보자고 했죠. 그래서 탄생한 곡이 ‘사랑의 썰물’입니다. 김창기 씨의 슬픈 사랑이야기가 모태가 됐지요."
 
- 고 김광석씨와도 특별한 인연이 있다던데요.

"‘사랑의 썰물’이 히트할 즈음 노래하기를 좋아했던 친구 몇몇을 음반회사에 소개해준 적이 있어요. 그 친구들 중에 김광석 씨도 있었어요. 김광석씨를 주축으로 탄생한 그룹이 동물원이죠. 제가 김광석 씨를 가요계에 데뷔시켰다고 보면 됩니다(웃음). 

김광석 씨는 이전에 만났어요. 대학가 앞에서 노래를 많이 부르던 시절이었는데 김광석 씨가 그렇게 노래를 하고 싶어 했어요. 제가 라이브 카페에서 공연할 때였는데 제가 몸이 안 좋거나 공연이 여의치 않을 때는 김광석 씨를 무대에 올린 적도 여러 번 있어요. 세상을 떠나서도 김광석 씨가 대중에게 사랑 받는다는 게 참 좋아요. 조금 더 오래 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항상 마음 한쪽에 남아 있습니다." 
 

- ‘사랑의 썰물’로 데뷔하기 전에 활약했던 ‘김창완과 꾸러기’ 멤버 시절 3장의 앨범 얘기를 들려주시죠.

"1985년에 저와 최성수, 김창완, 윤설하, 권진경 등 6명의 멤버와 6개월 동안 3장의 앨범을 냈어요. 1985년 ‘꾸러기들의 굴뚝여행’, ‘꾸러기들의 크리스마스’, 1986년 ‘꾸러기들 사랑, 이별, 그리고 추억’이 그 앨범입니다. 6개월간 3장의 앨범을 낸다는 건 경이로운 기록입니다. 산울림의 리더 김창완씨의 공이 컸죠. 다들 노래를 잘 하니까 곡만 만들어지면 쉽게 앨범을 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100일 라이브 콘서트’도 빼놓을 수 없는 얘기잖아요.

"대학로 소극장 문화가 시작된 건 1985년 봄이에요. 꾸러기의 첫 공연은 대학로에서 했어요. 소극장 공연을 하다가 ‘우리도 추억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기획을 했어요. 그게 ‘100일 라이브 콘서트’입니다. ‘100일 라이브 콘서트’는 1985년 10월10일부터 1986년 1월17일까지 이화여대 정문 근처에 위치한 ‘민예소극장’에서 했어요. 100일간 하루도 쉬지 않고 공연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꿈같아요. 그런 패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어요(웃음).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00일 라이브 콘서트’ 마지막 공연 때 ‘김창완과 꾸러기’는 공식 해체했습니다."
      
- 한양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는데 특별히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참 외로웠어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거든요. 위로 터울이 많이 나는 누나 한분이 계신데 서독에 간호사로 나갔는데 그땐 외로움이 더 심했어요. 그래서 누나가 남기고 간 기타를 치면서 외로움을 달랬어요. 밥 딜런, 김민기, 한대수, 양희은, 트윈폴리오 등의 음악을 듣고 노래하면서 자랐습니다.

원래 꿈은 가수가 아니었어요. 방송국 무대연출이나 기획 쪽에 관심이 많아 프로듀서가 꿈이었죠. 음악은 취미로 시작을 했는데 이렇게 평생 직업이 될 줄 몰랐어요. 노래를 조금 한다고 소문이 나니까 음반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어요. 2년 정도 피해 다니다가 1984년 산울림의 김창완 선배와 음악을 시작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1985년 ‘김창완과 꾸러기’ 멤버로 앨범에 참여했습니다."
 
- 임지훈 하면 ‘슬픈 목소리’라는 평이 있는데요.

"포유류가 내는 소리 중에 가장 슬픈 목소리라는 평도 있고요. 소설가 이외수 씨는 ‘지상에서 가장 슬픈 목소리’가 임지훈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제가 들어도 가끔 제 목소리가 슬프게 들릴 때가 있어요. 아마도 제가 어렸을 적부터 외롭게 자라서 그 감성이 목소리에 배어 있어서 그렇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제 목소리가 좋습니다."
 
- 6집까지 솔로 앨범을 냈는데 그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이 있다면.

"그때 그때 달라요. 노을이 질 때, 비나 눈이 올 때, 슬플 때, 즐거울 때 상황에 맞춰서 노래를 하게 됩니다. 상황에 따라 좋아하는 노래가 달라지는 셈이죠.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 라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부모가 자식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처럼 제 노래는 다 좋습니다(웃음)." 

- 아들이 아이돌 가수로 데뷔하셨다고요.
"‘비투비’라는 아이돌 그룹으로 활동 중인 가수 임현식이 제 아들입니다. 요즘 얼굴도 잘 못 봐요. 음악을 시작했으니까 좋은 음악인이 됐으면 좋겠고요. 많은 경험을 통해서 아파보기도 하고 실수도 하면서 좋은 뮤지션으로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렇게 상처투성이 경험이 음악으로 승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됐으면 더욱 좋겠고요. 한국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해줬으면 합니다. "

- 아버지가 보는 아들은.

"아들이 데뷔하기 전엔 아이돌을 가벼운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데뷔과정을 지켜보니까 그게 아니었어요. 깜짝 놀랐어요. 제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하더라고요. 춤, 노래, 작사와 작곡 등 가수가 되기 위해 쉴 틈 없이 연습을 하고. 외적으로도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하니까 운동과 식이조절에 특히 신경을 쓰더라고요. 책도 많이 읽고 하루를 정말 알차게 보냅니다. 24시간이 부족해 보일 정도의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어요.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저를 돌아봤어요. 음악을 하면서 직장인처럼 ‘매일 음악을 8시간 이상 했나?’라는 생각을 하다가 부끄럽더라고요. 아들을 보며 저 스스로가 달라지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 젊은 세대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옛 노래를 많이 사랑해줬으면 좋겠어요. 포크 이전의 노래를 듣다보면 깊이가 있어요. 멋도 있고 서정적이지요. 요즘 20~30대도 우리 부모님은 어떤 음악을 들으면서 젊음을 공유했을까 하고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어느 날 우리 아들이 아빠는 어떤 노래를 듣고 지냈냐고 묻더라고요. 노래를 들려주니까 좋아하더라고요. 점점 세상이 빨라지고 정신이 없는데 젊은이들이 예전음악을 들으면서 조금은 정적인 사람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기다림의 미학이 있었잖아요. 휴대폰은 잠시 내려놓고 기다림의 의미를 깊게 생각했으면 합니다."
 
- 앞으로의 바람은.

"더 좋은 노래를 만들고 싶어요. 가방에 항상 메모장을 가지고 다녀요. 그때 그때 메모를 해요. 제가 쓴 메모를 읽다보면 글이 되더라고요. 요즘엔 곡보다 가사를 많이 쓰고 있어요. 곡은 어느 날 기타를 쥐게 되면 곡이 나오니까요. 항상 음악을 즐겁게 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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