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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읽는 한 여인의 성장사… "여자는 끝없이 진화한다"

입력 : 2013-03-24 11:35:36 수정 : 2013-03-24 11: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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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젤리/김은경 지음/삶창/8000원

 2000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한 김은경(37) 시인이 첫 시집 ‘불량 젤리’를 펴냈다. 문단에 얼굴을 내밀고 13년 동안 쓴 시 54편을 한데 묶었다. 등단 이후 꽤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온 첫 작품집인데도 시인의 태도는 의외로 담담하다. 시집을 넘기면 처음 눈에 들어오는 ‘시인의 말’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물고기의 살만 온전히 취할 수 없는 것처럼, 기어이 버릴 수 없는 가시가 있어 시를 쓴다. 여기 얹힌 것들이 궁기만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시인의 작품은 한때 유행한 자폐적이고 난해한 시들과는 전혀 다르다. 생생하고 발랄한 언어로 ‘곰삭은’ 정서를 표현한다. 등단 당시 24살이었던 그도 어느덧 30대 후반의 나이가 됐다. 그래선지 시인의 작품을 읽다보면 여인의 성장사가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소녀에서 처녀, 아주머니에서 할머니로 ‘진화’하는 한 여자의 일대기를 ‘가슴’이라는 소재로 풀어낸 다음 시가 대표적이다.

 “밤만 되면 가슴이 자꾸 아팠다/ “부라자 했냐?”/ 열두 살 손녀에게 할머니는 물었다/ 부라자가 뭐까/ 부라자가 뭐까/ 부랑자도 아니고/ 불도저도 아닌 그것이 종일/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유방암으로 가슴을 도려낸 작은엄마는/ 제3병동에서 끝내 고장난 세탁기처럼 울었다/ 숙모의 브라자는 분홍빛/ 나의 브라자도 분홍빛/ 우리는 같은 색의 끈으로 등을 감쌌다// … 가슴을 만져본다/ 가만히 쓸쓸하고/ 가만히 가여울 때/ 브라자가 거기/ 한 장의 손수건처럼 덮여 있다.”(‘가슴의 쓸모’ 중에서)

 한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아무리 ‘여성대통령 시대’라고 떠들어 대도 그건 극소수 잘난 여성의 이야기일 뿐이다. 대다수 평범한 여자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취직을 위해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 있거나, 가족의 식탁을 더 풍성히 차리고자 아등바등 장을 본다. 시인은 이 시대 여인들의 슬픔을 유산의 비극에 빗댄다. 그녀들의 한(恨)이 응어리진 눈물을 닦아주며 “그래도 힘을 내라”고 위로하는 듯 하다.

 “고백이라는 단어 속엔/ 타다 만 시베리아 자작나무 냄새가 나지/ 미처 잠들지 못한 검은 눈의 아이들이/ 자장자장 레퀴엠을 창문에다 각인하는 밤/ 빈 창문들이 유령 대신 일어나 흐느끼는 밤// 백년 전에 식은 재는 여직 눈꺼풀로/ 반짝이고/ 눈을 뜨는 순간 돌처럼 굳어버릴 혀로/ 여자는 사랑을 노래한다/ 하품만 해도 눈물이 새 나온다// 비문(碑文)도 없이 여자의 몸에서 또 한 덩이/ 잿더미가 태어난다.”(‘주저앉아 우는 여자’ 중에서)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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