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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68> 구원

입력 : 2013-02-13 09:47:12 수정 : 2013-02-13 09: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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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질곡에서 돌고 돌아 다다른 곳엔 빛이 있었다 # 구원을 기다리는 시간

구원이란 어려움에 빠진 누군가를 구해주는 행위를 뜻한다. 가끔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예수 믿고 구원 받자’라고 크게 쓴 피켓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어떤 도탄에 빠져있음을 의미하고, 누군가가 우리를 도탄에서 구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일방적으로 우리의 상황을 도탄에 빠진 것으로 보고,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을 죄악의 상징인 소돔과 고모라처럼 바라보는 시각이 마땅치 않다. 혹 그렇다고 해도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지키고 고양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벗어난다는 것에도 반감이 생긴다.

서양의 현대 철학은 이러한 생의 자세에서 시작되었다. 동양과 서양의 종교에서 구원에 대한 입장은 크게 다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이 죄로부터 구해지는 것을 의미하고, 힌두교에서는 무지로부터 깨어나는 것을 의미하고, 불교에서는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깊은 산속이나 한적한 숲 속이 아니라 평상시에 늘 차들로 가득한 대로변에 위치하고 있다는 경동교회의 입지적인 단점은 건물의 몸을 따라 빙 둘러가는 진입로로 극복된다.
영화 ‘길(La Strada)’에서 젤소미나의 상대역 잠파노로 나왔고, ‘노틀담의 꼽추’와 ‘희랍인 조르바’ 등에서도 호연을 보여준 앤서니 퀸은 우리가 참 좋아하는 영화배우다. 그의 출연작 중에서도 그가 아니면 보여줄 수 없는 연기를 보여준 영화는 주정뱅이 와인장수 봄블리니가 얼떨결에 시장이 되어 독일군으로부터 동굴에 숨겨놓은 와인을 지킨다는 내용의 영화 ‘산타비토리아의 비밀’이다. 마지막에 광장을 빙빙 돌며 우멍하면서도 충직한 표정으로 느릿느릿 덩실거리는 춤을 추는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또 하나는 게오르규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25시’의 끝 장면에서 보여준 그의 표정이다. 끝없는 불행을 겪는 근면하고 정직한 루마니아인 모리츠의 인생역전을 다룬 이 소설은 도무지 고난의 끝이 어딘지, 도대체 구원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루마니아의 농부 모리츠는 아내를 노리는 헌병의 모함으로 유대인 강제수용소에 갇힌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헝가리로 탈출하지만, 그곳에서는 적성국 루마니아인이라며 모진 고문을 당하고 포로로 감금된다. 포로가 된 모리츠는 독일에 끌려가 전쟁노무자로 일을 한다. 그곳에서 독일군 장교의 눈에 띈 그는 얼떨결에 게르만족의 순수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으로 인정받아 포로 감시병 노릇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모리츠는 기회를 틈타 프랑스군 포로를 데리고 연합국 진영으로 탈출해 영웅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루마니아 출신이라는 것이 드러나며 전범으로 분류되어 다시 수용소에 갇힌다. 전쟁이 끝나고 천신만고 끝에 석방되어 가족과 재회하지만 그는 다시 18시간 만에 감금된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동유럽인 체포령이 내려진 것이다.

마지막에 다시 전쟁터로 나가야 하는 앤서니 퀸에게 웃으라며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진사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심란한 심정이 드러나는 앤서니 퀸의 표정연기는 정말 잊히지 않는 명장면이고 명연기이다.

“25시는 인류의 모든 구원이 끝나버린 시간이라는 뜻이야. 설사 메시아가 다시 강림한다고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는 시간인 거지. 최후의 시간도 아닌, 최후에서 이미 한 시간이 더 지난 시간이지. 서구 사회가 처한 지금 이 순간이 바로 25시야.”

‘25시’는 신조차 구원할 수 없는 시간을 의미한다.

# 레 미제라블, 예측할 수 없는 구원의 인과관계

어릴 때 읽었던 ‘장발장’이라는 제목의 소년소녀 명작 시리즈는 내용이 축약되다 못해 심지어 뒷부분은 뭉텅 썰려 나갔었다. 장발장이 빵을 하나 훔치다가 감옥에 갇히고, 어떤 자애로운 신부가 그를 구원해주고, 그리고 그를 어떤 표독한 형사가 쫓는다까지만 기억이 난다. 빨간 머리 앤과 허클베리 핀과 키다리 아저씨 등, 알록달록한 표지에 내용과 그림이 거의 반반이었던 그 어린이용 세계 명작들 사이에서 장발장은 크게 매력이 있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책의 원제가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이라는 것은 중학교 때나 돼서야 알았다.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어로 ‘비참하고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그들이 겪는 처절한 고난을 뜻하는 단어라고 한다. 그리고 장발장 혹은 19세기의 유럽 사람들이 겪었던 혹독한 시대 상황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 것을 알지 못한 채 나는 오랫동안 오로지 계몽으로만 일관했던 그 이야기에서 어떤 감동도 만나지 못했었고, 그냥 어떤 입지전적인 인간의 성공신화로만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것이 다섯 권 분량의 책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 소설은 장발장을 구원해준 미리엘 주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것도 무려 100여 쪽에 걸쳐서 그 주교가 얼마나 훌륭한 인격과 온화한 품성을 가진 사람인가에 대한 감동적인 전제가 펼쳐진다. 그리고 등장한 장발장은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시집 간 누이의 집에서 자라, 성인이 되자마자 누이와 어린 일곱 명의 조카들을 책임지게 되어 가지치기 작업을 하며 힘들게 살아간다. 그러다 일이 없는 겨울 너무 궁핍하여 빵을 하나 훔치다 잡혀서 5년형을 받게 된다. 형 만기 1년을 남기고 탈옥하다가 다시 형이 더해지고, 몇 번의 탈옥 실패로 그는 19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다. 출옥 후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그를 미리엘 주교는 따뜻하게 받아주고, 심지어 아끼던 은그릇을 훔쳐 달아났다가 경찰에 붙들려 돌아온 그에게 은촛대까지 내어준다.

1980년에서 1981년 사이에 지어진 서울 장충동의 경동교회는 고 김수근 선생이 설계한 작품이다.
공간그룹(www.spacea.com) 제공
“장발장, 나의 형제여. 당신은 이제 악이 아니라 선에 속하는 사람이오. 나는 당신의 영혼을 위해서 값을 치렀소. 나는 당신의 영혼을 암담한 생각과 영벌의 정신에서 끌어내 천주께 바친 거요.”

여기에서 첫 번째 구원이 이루어진다. 커다란 감화를 받은 장발장은 또한 커다란 혼란에 빠지게 된다. 몇 년이 지나고 마들렌이라는 이름으로 몽트뢰유쉬르메르시에 정착한 장발장은, 구슬을 가공하는 사업으로 큰돈을 벌어 그 도시의 경제를 살리고 급기야 그곳의 시장이 된다. 그리고 그가 감옥에 있을 때 간수였고 그가 시장으로 있는 도시의 경관인 자베르는 장발장을 의심한다.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 아는 내용이다. 그 이야기에 19세기 중반을 살았던 프랑스 민중의 역사가 씨줄과 날줄로 얽힌다. 빅토르 위고는 그 모든 것을 상세하고 치밀하게 묘사한다. 이 길고도 긴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구원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신에 의한 구원이라거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식적인 구원이 아닌, 보다 복잡한 형태의 구원이다. 장발장을 평생 괴롭히던 자베르, 오로지 규율과 권위에 대한 존경이 그를 이루는 모든 것인 자베르를 인간의 길로 구원하는 것은 장발장이었다. 또한 파리의 길고도 복잡한 하수구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선 장발장을 구원하는 것도 바로 자베르이다. 그리고 끝까지 악으로 점철된 인간으로 나오는 테나르디에는 장발장을 오해하고 있던 코제트의 남편 마리우스에게 진실을 밝힘으로써 본의 아니게 장발장을 구원한다. 그리고 마리우스 대신 총을 맞음으로써 구원한 에포닌, 승승장구하는 장발장을 미워하며 욕하다가 수레에 깔린 그를 꺼내준 장발장의 도움으로 살아나 평생 장발장을 여러 차례 구원해주는 포슐르방 노인 등, 소설은 서로서로 얽히며 의도치 않게 구원해주는 복잡한 인간사의 단면을 보여준다. 단선적이지 않은, 예상할 수 없는 인과관계의 구조와 인간에 대한 성찰이 이 소설의 뛰어난 점이다.

# 구원의 빛에 다다르는 길

기독교뿐 아니라 유대교·이슬람교 등은 신에 의해서만 인간이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 서양의 종교가 그런 식으로 누군가의 힘에 의해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동양의 종교는 자신의 깨침과 노력으로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생겨난다. 그런 종교적인 입장은 교회와 절 등의 종교 건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동양의 종교 건축은 걸어서 깊이 들어간다. 특히 우리나라 절의 구조를 보면 인간은 차츰차츰 높고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가서 좌정하고 부처님과 만난다. 물론 여러 사람이 있는 공동의 회당이지만 그곳에서 인간은 신과 독대를 하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 깨치고 깨달음을 얻어 희열을 느끼게 된다. 그에 반해 서양의 종교 건축은 신에게 구원을 받기 위해 인간이 그 안에 들어가면, 신령스런 빛의 인도에 따라 정해진 규율을 지키고 고개를 낮추고 숙이고 숙여야만 한다.

경동교회는 종교적·공간적으로 극대화된 성스러운 내부를 거치며 무척 부드러워진 빛이 실내로 들어와 바닥과 벽에 부딪히며 찬란하게 퍼진다.
공간그룹 제공
종교가 처음 태동하고 사람들이 모여서 집회할 장소를 만드는 과정을 보면 어떤 우연의 요소들이 꽤 많다. 초기 교회의 양식인 바실리카는 상업거래소로 사용되는 건물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국의 팔각다층의 불교사찰 양식도 외국에서 온 상인들이 머물던 장소에서 출발하였다. 그렇다면 종교 건축은 애초에는 어떤 종교적인 신념을 형상화하기보다는 사람이 많이 모일 수 있는 대공간에서 시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다 점점 시간이 지나며 하나의 양식이 생기고, 그 위에 종교적인 채색이 곁들여지면서 하나의 전형이 된 것이다.

교회의 양식은 점점 무르익다가 고딕에 가서 절정을 이룬다. 극단적으로 근엄하고 성스러운 고딕양식 이후, 현대의 교회는 많은 변화를 겪는다. 심지어 요즘의 교회는 종교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현대의 소비적인 건축을 따르는 경향마저 느껴진다. 현대라는 큰 테두리와 자본주의라는 절대 신앙은 종교 건축마저 변하게 한 것일까.

영생에 대한 의지와 구원에 대한 갈망을 담고 있었던 종교는 혹은 종교 건축은, 이제는 그 핵심적인 가치를 제거한 채 사람들을 모으고 사람들의 헌신만을 바치게 하는 장치로 변화하고 있다. 위계가 사라진 공간과, 성스러움이 사라지고 육성이 사라진 채 모든 것이 기계적이고 효율적으로 바뀐, 심지어는 모니터를 통해 예배를 보는 교회 혹은 성당에서 우리는 어떤 신을 만나게 될 것이며 어떤 세계로 ‘들림’을 꿈꾸게 될 것인가.

김수근이 설계한 서울 장충동 경동교회에는 창이 없다. 중세 유럽의 성처럼 견고하고 폐쇄적이다. 위로 올라가며 점점 안으로 오므려지는 붉은 벽돌을 쌓아올린 몸에는 바람 한 점 들어갈 틈도 없고, 그 몸을 빙 돌아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몸에 비해 아주 작은 문이 나온다. 그리로 들어가면 마치 카타콤과도 같은 어두운 실내가 나온다. 마치 공룡이나 거대한 동물의 몸 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건물의 골격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여기저기 사람들이 들어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주머니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그리고 정면에 아주 단순한 십자가가 하나 걸려 있고 그 위로 빛이 떨어진다. 종교적·공간적으로 극대화된 성스러운 교회 내부를 거치며 무척 부드러워진 빛이 실내로 들어와 바닥과 벽에 부딪히며 찬란하게 퍼진다. 구원의 빛이란 그런 빛이다.

깊은 산속이나 한적한 숲 속이 아니라 평상시에 늘 차들로 가득한 대로변에 위치하고 있다는 입지적인 단점은 건물의 몸을 따라 빙 둘러가는 진입로로 극복된다. 그 길은 내부도 아니고 외부도 아닌 어딘가로 들어가는, 마치 깊은 산속에 있는 한국의 사찰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경동교회는 깨침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는 동양적 구원의 방식과 절대자의 빛에 의해 구원받는 서양의 구원이 어떻게 공간을 통해 자연스럽게 융합되는지를 보여주면서, 그곳을 찾은 사람에게 스며드는 듯 편안하면서도 엄정한 종교적 체험을 안겨주고 있다.

임형남, 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작은 집, 큰 생각’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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