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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소설)] 신 귀토지설(新 龜兎之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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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1-02 02:58:07 수정 : 2012-01-02 02:5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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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사나이 인생이라는 말을 좋아했다. 그래서 말끝마다 사나이 인생을 붙이곤 했다. “사나이 인생, 한 방 아닙니까.”라든가 “그것이 다 사나이 인생 아니겠습니까.”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자신의 양쪽 가슴을 번갈아 쳐보였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쿵쾅쿵쾅. 그런 아버지가 좋아하는 라면 역시 신라면이었다. 사나이 울리는 농심 신라면. 그 신라면을 먹고 난 후에도 가슴을 쳐대곤 했다. 쿵쾅쿵쾅, 사나이의 가슴을. 심지어는 벌이는 사업도 사나이 인생다웠다. 매번 단 한 방에 망해서 아버지를 울렸던 것이다. 불공평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인생들이 있다. KO승만 하는 인생 혹은 KO패만 하는 인생. 아버지는 후자 쪽 인생이었다.

아버지가 벌였던 마지막 사업은 도박장과 성인게임장이었다. 취사병 경력 하나 믿고 개업했던 매운탕 식당이 망하자,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그리고 한 달 만에 돌아와서는 앉은뱅이 밥상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고 있던 식구들 앞에다 봉투 하나를 턱 하니 내려놓았다. 봉투 안엔 끈으로 묶인 지폐 돈 다발들이 가득했다. 난생 처음 보는 돈 뭉치에 어머니가 놀라서 돈의 출처를 물었지만, 아버지는 “사나이 인생, 딱 한 방이었지!”라고만 대답하며 방의 오른쪽 벽면에 걸린 달력을 검지로 가리켰다. 88년 6월, 올림픽게임 개막일을 3개월 남겨둔 날이었다.

“88 올림픽, 바로 저거다.” 

그림=김광한·화가
그 말에 큰언니가 밥을 먹다 말고 일어나 양 팔을 흔들어댔다. 학교에서 배운 올림픽게임 개막식 안무였다. 그러자 둘째언니가 혀를 내밀며 약을 올렸다. 연년생인 언니들은 툭하면 그렇게 으르렁대곤 했다. 결국 기어코 싸움이 난 언니들을 말리던 어머니가, 여전히 달력을 가리키고 있는 아버지에게 무슨 생각이냐며 물었다. 아버지는 여자가 말이 많다며 눈을 부릅뜨고 어머니를 보더니 곧 큰소리를 탕탕 쳐댔다.

“사나이라면 모름지기 한 방을 좋아하는 진짜 사나이들을 상대로 돈 장사를 해야지. 걱정 마, 다들 그냥 날 따라오기만 하면 돼.”

그렇게 선언한 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신라면을 2개 끓여오라고 했다. 그리고 라면을 먹자마자 가정집 겸 식당인 우리 집의 지하실로 내려갔다. 원래 그 지하실은 식재료 창고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아버지는 그 창고를 비운 뒤 TV 몇 대, 책상, 의자 등을 새로 들여왔다. 동네 근처 경마장에서 사용하다 버린 낡은 베팅 칠판도 구해 와, 창고 한 쪽 벽면에 걸었다. 그렇게 간판은 매운탕집이지만 실상은 도박장인 아버지의 새로운 사업은 조금씩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기대가 커질수록 아버지가 웃으며 가슴을 치는 횟수도 늘어났다. 그런 아버지를 볼 때마다 둘째언니는 손가락을 자신의 관자놀이에 대고 빙글빙글 돌리곤 했다.

우리 도박장 환전소는 식당 밖에 딸린 화장실을 개조한 것이었다. 88 올림픽이 다가오자 철저해진 경찰의 단속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화장실 안은 소변기 1개와 각 칸마다 좌변기가 하나씩 설치된 2칸의 공간이 전부였다. 아버지는 그 2칸 중 오른쪽 칸을 환전소로 만들고, 칸을 나눈 벽에 매표소에서 볼 수 있는 매표구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구멍을 통해 베팅표나 돈이 오갔다. 도박장을 찾은 손님들은 화장실로 들어와 왼쪽 칸의 좌변기 뚜껑 위에 걸터앉았다. 벽을 3번 두드리면 휴지로 막아놨던 구멍이 열렸다. 그곳을 통해 손님은 무언가를 속삭였고 오른쪽 칸에 있는 누군가는 표나 돈을 건네곤 했다. 그 누군가는 늘 어머니였다. 당시 나를 임신했던 어머니는 하루 종일 입덧을 하며 손님을 맞이했다. 그러다가 가끔 견딜 수가 없어질 때는 가슴을 쳤다. 아버지처럼. “어이쿠, 어이쿠” 그럴 때마다 뱃속의 나도 발로 어머니의 배를 찼다고 했다. “어이쿠, 어이쿠!”

그렇게 도박장 개업을 준비하는 사이 9월이 왔고 올림픽이 열렸다. 개막식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큰언니는 식구들에게 자신을 봤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날은 개업 때문에 모두 바빠서 TV를 볼 겨를이 없었다. 그 때문에 시무룩해졌던 큰언니와는 달리 올림픽의 열기는 갈수록 고조되어 갔다. 우리 집 식당은 찾아온 손님들로 북적였다. 물론 그들의 목적은 지하실에 있었다. 올림픽은 하나의 거대한 도박판이 되어 버렸고, 신이 난 아버지는 계속해서 손님을 부지런히 끌어왔다.

그러는 동안에 내가 태어날 날도 가까워져 갔다. 출산 날, 어머니는 아침부터 진통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환전소에서 12번째 손님을 맞이할 때 양수가 터져버렸다. 12번째 손님이 벽을 3번 두드린 뒤 말했다. “레슬링, 한국, 김영남으로 5장!” 어머니는 표에 도장을 찍어 주면서 이를 악물며 말했다. “곧 애가 나와요. 주인한테 말 좀 전해 주세요.” 그러나 12번째 손님은 말없이 표만 받고 나가 버렸고, 한참 뒤에도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어머니는 그 좁은 공간에서 혼자 다리를 벌리고 심호흡을 했다. 12번째 손님의 말을 곱씹으면서. “레슬링, 후아! 한국, 후아! 5장, 후아!” 그렇게 심호흡을 10번쯤 반복했을 때, 밖에서 사람들의 환호가 들려왔다. 동시에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힘을 주었다. “후아후아, 5장!” 어머니는 내심 이번에야말로 아버지가 바라던 레슬링을 할 수 있는 튼튼한 사내아이였길 바랐다. 그러나 다리 사이에서 받아낸 나를 확인하고는 힘없이 내 등을 팡팡 쳤다. 힘없는 두들김에도 나는 맹렬하게 울어댔다. 아기 울음소리가 나서야 아버지는 달려왔고, 세 번째 딸임에 탄식했다. “사나이 인생에 사나이가 없다니?”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나를 안고 있던 어머니를 향해 원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쳐보였다.

올림픽 특수를 탄 도박장은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아버지는 국내대회부터 국제대회, 아시안게임, 올림픽 등 대회가 열릴 때마다 도박장을 열었다. 그리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이 끝나갈 즈음, 식구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말했다. “시대는 변했어. 더 큰 것을 노려보는 거다.” 그러면서 창고를 다시 비우고 이번엔 감시용 카메라와 비상구를 만들었다. 그 뒤 슬롯머신들을 들였다. 화려한 슬롯머신의 외관에 아버지는 감탄의 연속이었지만, 어머니는 한숨의 연속이었다. 슬롯머신 중 단연 인기 있던 것은 ‘바다이야기’였다. 아버지는 손님을 끌어모으려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나중에는 언니들도 거리를 다니며 손님을 모았다. 낯가림이 심한 큰언니는 제대로 못했지만, 괄괄한 둘째언니는 될 법한 사람들에게 다가가 명함 크기 전단지를 주며 말했다. “바다 구경 좀 하실래요.” 대개는 둘째언니를 힐끔거리다 가버렸지만 더러는 알아듣기도 했다. 그렇게 가끔 언니들을 따라 손님이 오면, 아버지는 용돈을 주곤 했다. “계집애들도 한 건 할 때가 있구나.”

이번에야말로 잘될 것 같았던 게임장은 그러나 곧 정체되고 말았다. 전국이 ‘바다이야기’로 들썩이자 단속이 더욱 강화된 것이다. 많은 게임장들이 문을 닫았고, 단속을 요리조리 잘 피해가던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날 배가 불룩 나온 경찰관 한 명이 불쑥 식당을 찾아와, 매운탕 한 그릇 얻어먹으러 온 것이다. 아버지가 만일을 위해 준비했던 재료로 허겁지겁 매운탕을 끓이는 동안, 언니들은 비상구로 손님들을 탈출시켰고 나는 게임장 문을 자물쇠로 걸어 잠갔다. 환전소의 어머니도 상품권과 돈들을 치마폭에 싼 뒤 재빨리 빠져나갔다. 그러는 동안 경찰관은 매운탕을 먹으면서 쭈뼛거리며 곁에 서 있던 아버지에게 말했다. “매운탕은 안 팔고 묘한 짓거리를 한다는데?” 그에 아버지가 말없이 경찰관의 주머니에 흰 봉투를 찔러 넣었다. 그날, 경찰관은 매운탕을 싹싹 비우고 나서야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게임장을 나섰다.

그 경찰관은 자주 매운탕을 먹으러 왔었다. 그러자 손님들이 발길을 끊었다. 경찰이 빈번히 드나드는 게임장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 경찰관이 발령이 나 더 이상 오지 않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술에 손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딸만 셋을 주르륵 낳은 것을 비관하며 술을 물처럼 마셔댔다. “이게 다 이 집에 사나이가 없어서다!” 날이면 날마다 취해 있던 아버지는 집 안 물건들을 부수고 던지며 소리 지르곤 했다. “사나이 없는 집에 사나이 인생은 개뿔!”

아버지가 잔뜩 취한 새벽엔 도저히 집 안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우리와 함께 지하의 게임장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게임장 바닥에 이불을 펴고 누웠다. 여전히 불을 깜빡이는 ‘바다이야기’ 슬롯머신에서는 해산물과 숫자 등이 느릿느릿 돌아갔다. 그것을 보며 우리 세 자매는 감탄했다. “와, 용궁 같다!” 어머니는 그 용궁 같은 풍경을 바라보면서 우리 세 자매에게 토끼와 거북이 전설을 동화 구연하듯 이야기하곤 했다. 대학생이었던 언니들과 고등학생이었던 내게 그 전설은 지루했지만, 어머니의 목소리가 좋아 잠자코 들었다. 토끼의 간이 필요했던 병든 용왕과 간을 찾으러 토끼를 끌어온 거북이와 결국엔 꾀를 부려 빠르게 멀리 도망칠 수 있었다는 토끼에 대한 이야기를.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술 취한 아버지를 피해 게임장 바닥에 누워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큰언니가 불쑥 말했다. “거북이가 불쌍해.” 그러자 어머니가 큰언니를 보며 물었다. “토끼가 아니라?” 그에 큰언니는 씨근덕거리며 대답했다. “토끼를 놓쳤으니 용왕이 거북이를 가만두었겠어요? 거북이는 그저 충직한 신하의 의무를 다했을 뿐이에요.” 어머니는 대답 없이 천장을 바라봤다. 그러자 큰언니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어머니는 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어머니는 입을 살짝 벌렸다가 이내 다물어 버렸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큰언니는 무언가 복받친 사람처럼 계속 언성을 높였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그러자 둘째언니가 일어나 베고 있던 베개를 큰언니에게 던지며 말했다. “야, 너 진짜 싸가지 없다!” 그것을 시작으로 큰언니와 둘째언니는 서로 베개를 던지며 싸웠다.

언니들이 베개싸움을 하는 동안, 나는 넋을 놓고 있던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어머니가 나를 보고 웃었다. 사나이 인생에 필요 없는 세 번째 막내딸이었던 나를 아버지는 없는 아이 취급이었지만, 어머니는 그런 나를 제일 보듬어 안아줬었다. 나는 웃는 어머니를 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용왕은 어디가 아파서 토끼 간이 필요했던 걸까요?” 어머니는 또 입을 약간 벌렸다. 그것은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을 때 어머니가 하는 버릇이었다. 한동안 입을 벌리던 어머니가 씨익 웃으면서 이를 드러냈다. 어머니의 이 색깔은 누랬고, 언젠가 아버지에게 맞아 부러져버린 앞니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 구멍으로 바람이 쉭쉭 들어오자 이가 시렸는지 어머니가 입을 살짝 오므렸다. 그리고 나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아마 그 망할 영감도 누구처럼 술을 많이 마셨나보다. 술은 간을 망가뜨리거든. 너도 언젠가 용왕이나 거북이 같은 사람들을 만날 거야. 그럼 넌 꼭 도망치거라. 빠르고, 머얼리.”

그러면서 어머니가 다시 웃었다. 나는 어머니의 앞니 자리에 난 구멍 사이로 손가락을 살짝 집어넣어 보았다. 손가락 끝에 따뜻한 혀가 만져질 것을 기대했다. 간처럼 매끈매끈하고 따뜻할 혀를. 그러나 어머니의 입 안은 텅 비어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스물넷에 대학을 졸업할 즈음엔, 뭔가 지루하고 어수룩했던 인생이 조금은 바뀌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스물넷 생일을 얼마 앞두지 않은 나의 인생은 여전히 지루하고 어수룩하다. 그것은 나보다 조금 나이를 더 먹은 취업준비생 둘째언니도 그렇고, 그 둘째언니보다 나이를 한 살밖에 더 먹지 않은 8년차 치과위생사 큰언니도 마찬가지다.

나는 거실 바닥에 배를 깔고 누운 채, 둘째언니가 쓰다가 버린 이력서의 뒷면에 거북이를 그리고 있었다. 토끼를 놓친 거북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용궁으로 돌아갔을까. 나의 모나미 펜이 진노한 용왕에 의해 목이 잘린 거북이를 그렸다. 아니야, 육지로 도망가 버렸을지도 몰라. 모나미 펜은 다시 인간에게 잡혀 구워지는 거북이를 그렸다. 그 토끼는 어떻게 되었나. 이번엔 호랑이에게 잡아먹혀 다리만 남은 토끼를 그렸다. 자, 그렇다면 용왕은 죽었나, 살았나. 그에 비쩍 마르고 배만 불룩한 노인을 그렸다. 나는 죽어가는 용왕 그림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왕을 노랗게 칠해야만 한다. 방으로 노란색 연필을 가지러 가기 위해 일어서려는데, 곁에 앉아 사과를 깎던 큰언니가 불쑥 말을 걸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막내야, 난 이해할 수가 없어.”

큰언니는 그 일을 또 따져 물으려고 한다. 나는 그런 큰언니의 시선을 외면했다. 가끔은 아버지의 주정보다도 큰언니가 더 무섭게 느껴지곤 했다. 큰언니는 절대 울질 않았다. 생애 첫 공연을 가족들이 보지 않았을 때도, 간직해온 디자이너의 꿈을 포기하고 보건대학에 들어갔을 때도, 저축한 돈을 털어가며 사랑했던 남자의 아기를 홀로 지웠을 때도, 치위생사가 되어 첫 출근한 날 흡입기를 잘못 놀려 환자의 침을 얼굴에 뒤집어썼을 때도 울지 않았던 것이다. 침을 뒤집어썼던 그날은 대신에 계속 세수를 했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둘째언니가 수건을 들고 큰언니의 얼굴에 둘둘 감았다. “자, 이젠 울어도 돼.” 둘째언니가 큰언니에게 속삭였지만, 결국 그날 큰언니는 울지 않았었다.

“나, 막내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했다.”

이미 끝냈다고 생각한 이야기를 큰언니는 계속 끄집어내고 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딱히 반박할 수도 없어 잠자코 있었다. 그때 거실 한구석에 놓인 앉은뱅이 밥상에 앉아 32번째 이력서를 쓰던 둘째언니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아 손으로 사과 조각을 집어들었다. 접시 옆에 물고기 장식의 포크가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품위 없게.” 큰언니가 나무랐지만 둘째언니는 묵묵히 사과를 베어 먹었다. 그러면서 나의 그림들을 힐끔거렸다. 나는 그림들을 팔로 슬그머니 가렸다. 그러자 둘째언니가 시선을 큰언니에게로 돌리면서 말했다.

“막내가 싫대. 우리는 강요할 수 없잖아.”

“강요할 수 있어. 가족이니까.”

“너는 그저 할머니가 말한 돈 때문에 그런 거잖아, 이 계집애야!”

그러자 큰언니가 사과 조각을 하나 집어 둘째언니에게 던졌다. 둘째언니도 사과 조각을 던져버렸다. “둘은 정말 아버지를 닮았어.” 나는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아 버렸다. 어서 토끼의 간을 얻지 못해 노랗게 변하며 죽어가는 그 용왕을 완성하고 싶었다. 어두운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 책상 위에서 색연필 통을 찾아 노란색을 꺼내서 노인을 색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불룩한, 노란 피부의 노인이 완성되었다. 그 그림을 보면서 내 배를 만졌다. “당신에겐 절대 주지 않아.” 나는 꾀 많은 토끼처럼 빠르고 멀리 도망쳐 버릴 것이다.

어느 날부턴가 아버지는 술에 취해도 물건을 집어 던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집을 나간 지 3년째가 되면서부터였다. 그저 “사나이 인생 한 방! 사나이를 울리는!”이라고 구호를 외치다 잠드는 것이, 주정의 전부였다. 그에 우리 세 자매는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나는 가출한 뒤 가끔 내게만 안부전화를 걸어오던 어머니와의 통화에서 이제 돌아와도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화기 너머의 어머니는 대답 없이 쉭쉭거리는 숨소리만 들려주다, 다음에 또 연락한다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곤 했다. 언니들은 그런 어머니를 서운해했다. “우리는 딸도 아닌가.” 그때마다 나는 언니들이 좋아하는 궁중떡볶이를 만들어 달래줘야만 했다.

주정이 줄어든 아버지는 술 대신에 자꾸만 잠을 잤다. 햇볕이 잘 드는 거실 구석에 두꺼운 요를 깔아 놓고 리모컨을 쥔 채 종일 자곤 했다. 늘어지게 자고 나면 부스스한 몰골을 한 채 큰언니더러 라면을 끓여오라고 했다. “라면은 역시 신라면이지.” 아버지는 1개 분량의 물에 신라면 2개를 넣고 졸이게 끓일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짠 라면을 먹으며 케이블 채널의 영화들을 보다 또 잠이 들었다. 그것이 아버지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아버지가 쓰러졌던 밤도, 여느 때처럼 자다 일어난 아버지가 영화를 보며 라면을 먹고 있었다. 그날의 라면은 내가 끓였다. 큰언니는 회식이, 둘째언니는 면접이 있다며 나간 뒤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집에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토익 공부에 매진하던 나뿐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끓인 라면에 불평을 했다. “막내계집애 너는 잘하는 것이 없구나.” 그런 아버지의 다그침을 외면하며 영화를 보는 척했다. 영화에선 인간의 총에 맞아 머리가 깨진 좀비가 걸어 다니고 있었다. 저런 것을 보고도 아버지는 라면이 입에 들어가는가. 눈살을 찌푸리다가 갑자기 “케에엑!” 하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가 피를 토하고 있었다. 붉은 피가 불은 면발에 스며들었다. 그 때문에 급히 병원을 찾았고, 아버지는 간경화 말기 판정을 받았다. 그제야 나는 아버지가 왜 자꾸 배가 점점 불러갔는지 알 수 있었다.

아버지를 치료할 유일한 방법은 간 이식이었다. “가족이 낫죠. 걱정 마세요, 간은 금방 자라니까요.” 훤칠한 키의 담당의사가 설명했다. 둘째언니는 담당의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큰언니가 팔꿈치로 찌르고 나서야 시선을 돌렸다. 큰언니는 턱으로 담당의사의 왼손을 가리켰다. 그의 중지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꿈 깨라며 미소 짓던 큰언니에게 둘째언니는 말없이 자신의 왼손에서 중지만 세워 들이댔다. “이거나 드셔.” 기가 막혀 하는 큰언니에 이번엔 둘째언니가 미소를 지었다.

우리 세 자매는 즉시 간 이식에 적합한지를 위한 검사를 받았다. 긴 검사 과정에 피곤해진 둘째언니가 병원 복도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툴툴댔다. “간 조금 떼어주는 데 더럽게 복잡하네.” 큰언니가 혀를 차자 둘째언니가 이번엔 양 손의 중지를 세워 보였다. 그리고 노려보는 큰언니를 피해 다른 자리로 옮겨 앉았다. 나는 병원에서 풍기는 소독약 냄새를 맡으며 언젠가 모두 함께 갔던 바닷가를 떠올렸다. 그곳에서도 이런 냄새가 났었다. 그 냄새를 더듬으며 내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토끼를 그렸고, 그것을 반복하다 보니 손바닥엔 토끼가 옅게 새겨지게 되었다.

오직 나만 이식에 적합하다는 검사결과가 나왔다. 큰언니는 맞지 않았고, 둘째언니는 지방간의 수치가 높았다. 둘째언니의 결과에 큰언니는 웃는 입을 손으로 가렸다. 우울한 표정을 짓던 둘째언니는 자신의 뱃살을 살짝 쥐어보았다. “취업도 안 되는데 지방간이라니, 이건 비극이야.”

그러나 나는 언니들에 비해 건강했고 아버지의 간과도 궁합이 좋았다. 언제든지 이식을 할 수 있다는 담당의사의 말에 언니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왜였을까, 그 상황이 낯설지가 않았다. 잠시 말없이 서 있던 나는 곧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저는 원하지 않아요. 아무것도 주지 않을 거예요.”

그러자 담당의사와 언니들 모두 용왕의 충성스런 거북이가 지었을 법한 표정으로 변했다.

똑, 똑, 똑. 방 밖에서 누군가 노크를 해온다. 분명 큰언니일 것이다. 들어오지 않길 바랐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자 이번엔 방문이 열렸다. 언니들이 주춤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나는 막 완성한 그림만 들여다봤다. 목이 잘린 거북이와 구워지는 거북이, 잡아먹혀 다리만 남은 토끼와 죽어가는 용왕. 언젠가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가 여러 결말로 전해 내려진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 결말들을 알지는 못하지만 욕심으로 시작해서 욕심으로 끝나는 토끼와 거북이의 결말은 틀림없이 나의 그림들과 비슷하리라.

“막내야, 우리 이야기 좀 하자.” 눈치를 살피면서 서로를 쿡쿡 찌르고만 있던 언니들 중 큰언니가 용기를 냈다. 내가 따지려드는 큰언니를 무서워하듯, 큰언니도 말없는 나를 무서워했다. 나는 큰언니를 보지 않은 채 딱 잘라 싫다고 말했다. 

“그래, 아버지가 우리에게 좋은 아버진 아니었지.” 큰언니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둘째언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니는 뭘 몰라. 막내야, 우리 아버지가 돼먹지 못한 놈이었다는 건 알아.” 그에 큰언니가 둘째언니의 말버릇을 지적하자 둘째언니가 화를 냈다. “막내는 어린애가 아니야. 사실대로 말해야 된다고.” 이제는 내 방에까지 와서 싸우려는 언니들을 지나쳐 방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언니들이 내 어깨를 잡아왔다. 어깨를 잡은 언니들의 손에서 식고 축축한 땀이 느껴졌다. 차갑고 딱딱한 지느러미와 같은 감각. 소름이 끼쳐 내가 뒤돌아보자, 눈길을 주고받던 언니들이 동시에 말했다. 

“우리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까?”

라면은 큰언니가 끓였다. 2개 분량의 물에 신라면 3개를 넣은 짜고 불은 라면. 거실의 앉은뱅이 밥상 위에서 둘째언니의 이력서들을 치운 뒤, 우리 세 자매는 둘러앉아 TV를 보며 라면을 먹었다. 큰언니가 그릇에 라면과 국물을 떠서 내게 건넸다. 둘째언니는 입 한가득 라면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많이 먹어.”

많이 먹으란 말이 왜 이렇게 섬뜩하게 들리는 걸까. 나를 바라보는 언니들을 외면하면서, 뜨거운 면발을 후후 불어가며 라면을 먹었다. 굵은 라면 면발이 꾸역꾸역 식도를 타고 내려갔고, 짜고 매운 면에 자꾸만 물을 들이켰다. 그러나 언니들은 입맛까지 다셔가며 후루룩 면을 삼켰다. 언니들은 아버지의 식성을 닮았다. 그런 언니들을 보고 있자니 식욕이 나지 않아 TV를 봤다. 마침 TV 채널에서 아버지가 쓰러지던 날 봤던 그 좀비 영화가 방송되고 있었다. 둘째언니는 손발이 잘린 채로 괴성을 지르는 좀비에 신이 나서 말했다. 

“좀비가 왜 저렇게 늘어나는 줄 알아? 바이러스야. 바이러스 감염 때문에 그러는 거야.”

나는 영화에 집중했다. 좀비 바이러스는 피를 통해 돌고 돌아 감염된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좀비들을 탄생시킨다. 아버지도 하나의 바이러스였다. 매번 술을 마시고 사나이다움을 명분 삼아 누군가를 진창으로 끌어들였다. 그 지긋지긋한 바이러스가 이젠 언니들까지 감염시켜 버렸다. 언니들은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했던 것처럼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으니까.

처음부터 언니들이 내게 간을 줄 것을 종용하지는 않았다. 위험한 수술을 감당하기에는 우리에게 아버지란 존재가 너무 작았다. 둘째언니는 “너 짱이다.”라고 말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 때문에 병원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도 우리는 태연했다. “세상에, 자기 아버지를……. 요즘 애들은 무서워.” 그 수군거림은 마침내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아버지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식사를 날라다주던 아줌마를 통해서였다. “참말로, 새끼덜 뼈 빠지게 키워봤자 뭔 소용 있다요? 가안은 떼줘도 금방 자란다고 하든만.” 가안? 아버지는 아줌마와 한참을 씨름한 뒤에서야 그녀가 말하는 ‘가안’이 그 간임을 알았고, 우리들 중 누군가가 이식이 가능하지만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에 아버지가 우리 세 자매를 불러놓고 추궁하기 시작했다. “큰 년이냐? 작은 년이냐? 그도 아니면 막내 계집애냐?” 그러나 우리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아버지는 병실 안 물건들을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지며 물었다. “계집애들 중 누군가는 나를 살릴 수 있다!” 아버지의 물건 던지기는 병원 직원들이 와서 진정제를 놓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놔라, 이것들아! 이건 내 생사가 달린 문제야!” 진정제를 맞으면서까지 소리를 지르는 아버지를 피해 우리들은 도망쳤다. 그리고 병원 산책로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자판기에서 코코팜을 뽑아 나눠 마셨다. 코코넛 맛 알갱이를 씹어 먹던 둘째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누군지를 말해야 하지 않을까?” 

큰언니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럼 막내는 결국엔 간을 내놓아야만 할 걸.” 나는 다 마셔 빈 코코팜 캔을 재활용 통에 던져 넣었다. 둘째언니는 박수를 치며 브라보를 연발했고, 큰언니도 마지못해 박수를 쳤다. 그러고 난 뒤 큰언니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우리는 절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다. 절대로.” 그러자 둘째언니와 내가 박수를 쳤다. “브라보!”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이식 가능자가 나임을 기어코 알아냈다. 분개한 아버지가 몰아붙였다. 그러나 우리 세 자매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너라며, 제일 작은 년 너라며!” 나에게 삿대질을 하며 달려들던 아버지는 직원들에 의해 진정제를 맞고 정신을 잃었다가 기운을 차리면 다시 달려들었다. 때로는 간곡하게 애원하거나 빌기도 했다. “이 사나이 한 번만 살려주라!” 그래도 꿈쩍하지 않자 아버진 최후의 수단으로 할머니를 불렀다. 그동안 할머니가 한 번 오겠다고 해도 말리면서 병원비나 부쳐 달라고 했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를 통해 모든 전모를 알게 된 할머니는 지고 온 보따리를 병실 바닥에 내려놓기도 전에 지팡이로 내 등을 후려쳤다. “네 년이 수작을 부린다믄서? 독한 년, 그래도 니 애비다!” 할머니는 병원에 머무르면서 아버지가 했던 그대로 나를 설득하려 했다. 화를 내기도 하고 울며 매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단호해하자 할머니는 자신의 허리춤에서 통장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언니들과 내 앞에 턱 하니 펼쳐 보였다. “우와, 0이 일곱 개네.” 둘째언니가 감탄했다. 할머니의 통장에는 이천만원이 들어 있었다. 그러자 회진 차 병실에 있었던 담당의사가 정색했다. “할머니, 장기매매는 불법인데요.” 그에 할머니는 지팡이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가족인디 매매는 무신! 이눔아, 이건 용돈이여!” 지팡이를 피해 담당의사가 병실을 나가자, 할머니는 큰언니부터 통장을 차례대로 보여주며 말했다.

“네 아버지 치료빈디 너그덜 다 주마. 돈은 또 구하면 됭께. 간만 떼 주면 된다.”

할머니의 말에 나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큰언니와 둘째언니는 할머니의 통장에서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림=김광한·화가
어머니의 이는 아버지의 주정에 의해 계속해서 부러졌다. 아버지가 던진 리모컨에, 목침에, 주먹에 맞아 우수수 부러져 나갔다. 42세였던 어머니는 62세로 보였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늘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 중 어머니가 주정뱅이 남편한테 맞고 사는 한심하고 가엾은 여자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어머니를 동정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슈퍼마켓에 오면 주인아줌마는 재활용 비누나 콩나물 등을 덤으로 얹어주곤 했다. 어머니는 자신이 받은 덤들을 내게 줄곧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그리고 부러진 이를 드러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거 한 가지는 좋다, 그치?” 

어머니는 이가 부러져도 늘 아버지의 폭력을 받아냈다. 견딜 수 없어지면 지하 게임장으로 피신을 하고,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자매에게 들려주며 버텼다. 그러다가 어느 날 별안간 떠나버렸다. 언니들은 그런 어머니를 불쌍하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비난했다. “혼자만 도망가 버렸어.” 그러나 나는 어머니가 도망간 것이 아니라 떠나야만 했던 것을 알았다.

어머니가 떠나던 날, 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 며칠 전부터 있었던 감기 기운이 심해져 평소보다 일찍 집에 돌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집 안으로 들어서자 어딘지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낯선 이질감마저 엄습해오자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다리는 자꾸만 안으로 향했다. 그 안으로, 안으로. 내 눈에 들어오는 집 안의 살림가재들은 대부분 부서져 있었고, 그 광경은 이제까지 본 것 중에 가장 처참했다. 무서워져서 나는 어머니를 불렀다. 엄마, 어엄마아.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계속 어머니를 찾았다. 그러던 중 지하실 게임장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알아챘고, 한 걸음에 달려가 게임장의 문을 힘껏 열었다. 

그곳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었다. 나는 ‘바다이야기’ 슬롯머신에 기댄 아버지의 목을 조르고 있던 어머니를 발견했다. 처음엔 그 여자가 어머니가 아닌 줄 알았다. 미역줄기처럼 늘어진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목을 조르고 있던 그녀에게선 미소마저 엿보였으니까. 아버지는 컥컥대며 주먹으로 슬롯머신의 버튼들을 마구 내려치고 있었고, 슬롯머신 화면에 비치는 4개의 원판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급박하게 돌아갔다. 

아버지의 목을 조르던 어머니는 나를 발견하자 재빨리 손을 뗐다. 그러나 꾹꾹 눌러와져 있던 광기는 여전히 남아 아버지를 짓누르고 있는 듯했다. 어머니가 뱀처럼 쉭쉭거리면서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나를 봤다. 무언갈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아버지에게서 몸을 뗐다. 그러자 몸을 웅크린 채 아버지가 기침을 했다. 그런 아버지를 내버려두고 어머니가 내게로 다가와 섰다. 그리고 쉭쉭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떠나야 할 것 같구나. 빠르게, 머얼리.”

그 말을 남기고선 어머니는 게임장을 나섰다. 그제야 나는 내 다리 사이가 축축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리를 타고 흘러내린 노란 오줌이 방바닥을 적셨다. 그 오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는 떠났고, 아버지는 여전히 웅크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버튼을 쳐서 돌아가던 슬롯머신 4개의 원판은 숫자 7에서 전부 멈춰 늘어서 있었다.

라면을 먹고 난 뒤 후식으로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둘째언니 담당이었다.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면서 둘째언니가 커피믹스 스틱을 흔들었다. “몇 개씩?” 언니들은 2개, 나는 1개 반이었다. 달콤한 커피를 마시면서 우리는 말이 없었다. 큰언니는 큰언니대로, 둘째언니는 둘째언니대로, 나는 나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는 동안 좀비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갔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자마자 나는 커피를 마시다 말고 일어섰고, 언니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막내, 너 왜 그래.” 큰언니가 물어왔지만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버린 나는, 곧 코트를 들고 나와 껴입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어머니를 찾아가 봐야겠어.” 그 말에 커피를 마시다 혀를 덴 둘째언니가 찔끔거리며 물었다. “갑자기 어머니는 왜?” 그에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어머니라면 알 거야. 간을 줘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내 말에 큰언니와 둘째언니가 서로를 마주 봤다. 그리고 너나할 것 없이 일어나 옷을 입었다. 트레이닝복 위에 하늘색 반코트를 겹쳐 입던 큰언니가 말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어디에 있는 줄 모르잖아?” 둘째언니가 차키를 챙겨들고 현관을 나서자 나는 그녀의 뒤를 따르면서 대답했다. “몰라. 하지만 바다로 가면 될 것 같아.” 그에 언니들은 툴툴댔다. “에이, 그게 뭐야. 너무 막연하잖아.” 그러나 나의 단호한 표정에 곧 입을 다물었다. 나에겐 언제나 언니들한테는 없는 어머니에 대한 어떤 확신이 있었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를 내려왔다. 낡은 소형차는 오랫동안 사람 손을 타지 않았던지라 그늘진 구석에 주차되어 있었다. 갑작스런 여행을 제안한 내가 운전하기로 했다. 시동을 걸고 히터를 틀자 창에 김이 서렸다. 조수석에 앉은 둘째언니가 그것을 장갑으로 닦는 동안, 나는 운전석 창문에 서린 김 위에 손가락으로 토끼와 거북이를 그렸다. “그것 좀 그만 그려.” 내 바로 뒤에 앉은 큰언니가 손을 뻗어 그림을 지워 버렸다. 둘째언니 덕에 어느 정도 시야가 확보되자 차를 움직였다. 차는 단지를 빠져나와 바다 그 어딘가로 향했다.

한동안 국도로 가다가 경부고속도로를 탔다. 동해에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것은 큰언니의 결정이었다. 어머니가 동해에 있을 것 같아서가 아니라,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중간 지점에 있는 휴게소에 들러 우동을 먹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몇 년 전 돈만 축냈던 전 남자친구와 동해로 여행 갔다가 들른 휴게소에서 먹었던 우동이 참 맛있더라는 것이다. 입맛을 다시며 그때를 회상하던 큰언니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 여행비용도 다 내가 냈어! 게다가 그 여행 때문에 임신을 했었지.” 그러자 내 옆의 둘째언니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이거 본래의 목적에서 멀어지는 여행이 되겠는데.” 나도 둘째언니의 말에 동의했다.

큰언니 말대로 경부고속도로를 타던 중, 중간 지점에서 휴게소를 발견했다. 평일 저녁이라 휴게소 주차장은 한산했고, 어디선가 뽕짝이 울리며 엿장수가 커다란 가위로 엿을 자르고 있었다. 찰칵찰칵, 차에서 내린 둘째언니가 가위 짓을 손가락으로 흉내 냈다. “나도 이번까지만 이력서 쓰고 안 되면 엿장수나 할까봐.” 그러자 큰언니가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엿장수는 아무나 하니. 그냥 엿이나 드셔.” 둘째언니는 그런 큰언니를 흘겨봤다. “자기가 더 잘하면서 만날 나보고만 뭐래.” 

휴게실로 들어가자, 큰언니는 변덕을 부려 돈까스를 먹겠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새로운 추억을 만들 필요가 있는 것 같아.” 그러자 둘째언니가 큰언니 대신 우동을 먹겠다고 했고, 나는 볶음밥을 골랐다. 휴게소 볶음밥은 지나치게 부슬부슬했다. 우리는 말없이 음식을 먹었다. 그러다 둘째언니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동해 도착하자마자 올라와야겠다. 나 내일 면접 있어.” 그에 큰언니도 돈까스를 씹으며 끄덕였다. “나도 근무야.” 그러면서 두 사람은 한숨을 푹 쉬며 동시에 중얼거리며 나를 봤다. “돈만 있다면 이까짓 것들은…….”

언니들의 말에도 나는 묵묵히 볶음밥을 먹었다. 그러다 그만 밥 안에 들어 있던 오징어 살이 이 틈에 끼어 버렸다. 내가 혀를 이리저리 굴리며 오징어 살을 빼내려고 애쓰고 있을 때, 큰언니가 큰 돈까스 조각을 내 볶음밥 위에 올려주며 말했다. “그래도 우리 아버지잖아.” 그러자 금세 우동 국물을 비워낸 둘째언니가 오물거리며 말했다. “그래, 우리 아버지잖아.” 

언니들은 자꾸만 아버지라는 명목을 내세워 내 간을 빼앗으려고 한다. 자신들의 그 은근한 속내는 아버지에게 있지도 않으면서. 나는 그 두 사람을 참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이에 낀 오징어 살 때문에 짜증이 나던 참이었다. 결국 나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가 떠나게끔 했잖아. 그건 아버지가 아니야. 그리고 언니들도 좀 솔직해져라.”

화가 나서 밥을 먹다 말고 밖으로 나와, 혼자 차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나는 백미러로 이를 살피며 부지런히 혀를 굴렸다. 빠져라, 좀 빠져라.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오징어 살은 빠지질 않았다. 오히려 혀를 굴릴수록 더 깊숙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나는 한참을 낑낑대다가 이내 빼내는 것을 그만두었다. 언젠가는 빠지겠지. 그렇게 생각해 버리자고 마음먹었더니, 조금은 진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10분쯤 지나 언니들이 차로 돌아오자 다시 출발했다. 큰언니가 머뭇거리다가 내게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운전하는 나를 대신해 둘째언니가 아이스크림을 받았다. 그리고 껍질을 벗겨 내 입에 물려주었다. 입 안이 차가워지자 껴 있던 오징어 살로 불쾌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우리는 말없이 여행을 계속했다. 그 침묵을 깨고 자기 몫의 죠스바를 쪽쪽 빨던 둘째언니가 보라색 혀를 내밀며 말했다. “그냥 면접 안 가기로 했어. 하루쯤은 뭐.” 그러자 메로나를 베어 먹던 큰언니도 말했다. “나도 휴가 냈어. 하루쯤 뭐 어때.” 

아이스크림을 빨며 “하루쯤은 뭐.”를 번갈아 주고받는 언니들을 보면서 나는 의미 없이 “하루쯤은 뭐.”를 중얼거려봤다. 언니들은 늘 저렇게 손발이 잘 맞고, 말도 잘 맞았다. 끊임없이 싸우면서도 끊임없이 뭉치곤 했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나는 사나이식 인생이 전부였던 아버지에게도, 똘똘 뭉친 언니들에게도 항상 동떨어져 있는 대상이었다. 아버지에게는 딸이라는 이유로 그랬고, 언니들에게는 아직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그랬다. 오직 어머니만이 나와 함께였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내게 없다. 떠나야만 해서 떠나버렸다. 빠르고, 머얼리.

나는 유일하게 나와 가깝던 어머니를 찾아 향해가고 있다. 그녀라면 내가 선택해야 할 방향을 말해주지 않을까. 그녀가 아버지를 떠나야 했던 이유를 가진 것처럼, 나도 아버지에게 간을 줘야 할 이유를 알고 싶다. 

그림=김광한·화가
동해의 어느 바닷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큰언니가 남자친구랑 왔다던 그곳이었다. 밤의 바다는 파도소리만 들릴 뿐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애초에 어머니를 찾겠다고 한 것 자체가 무리한 여행이었다. 그러나 우리 세 자매는 신이 나 바다로 돌진했다. 큰언니는 전 남자친구랑 걸었던 모래사장을 발로 차며 뛰어다녔다. “바다에 왔다, 나쁜 자식아!” 큰언니가 욕을 하며 바닷가를 뛰는 동안, 나와 둘째언니는 모래성을 만들었다. 그러나 팍팍한 모래성은 자꾸만 무너졌다. 계속 무너지는 모래성에 질린 둘째언니가 만들다 만 모래성을 발로 밟은 뒤 바다로 몸을 던졌다. 풍덩! 그리고 수영을 했다. “난 아마 수영선수가 되었어야 했나봐!” 자유자재의 영법을 선보이며 둘째언니가 외쳤다.

우리는 곧 순찰 중이던 경비대에 의해 바다에서 나와야만 했다. 해안경비구역이라 밤에는 이용할 수 없다고 했다. 나와 큰언니는 아쉬워하는 둘째언니를 겨우 물속에서 끌어내 차에 올라탔다. 늦었으니 잘 곳이 필요했다. 다행히 바닷가 주변이라 숙박시설은 많았다. 화려한 네온사인들을 보며 천천히 운전하는데, 둘째언니가 한 곳을 가리키며 반색했다. “저기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바다이야기’라는 모텔이었다. “저긴 러브호텔이야.” 큰언니가 그 모텔을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그에 나와 둘째언니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큰언니가 순순히 시인했다.

“오냐, 바로 저곳이 임신이 되어 버렸던 바로 그 역사적인 장소다!”

우리는 ‘바다이야기’의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카운터 직원은 후줄근한 차림의 여자 3명이 모텔로 들어오자 이상하게 쳐다봤다. 그러자 큰언니가 더듬거렸고, 그를 한심하게 보던 둘째언니가 말했다. “그냥 방이나 주세요. 이 언닌 원래 바보예요.” 그에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떤 방을 고르겠냐고 물어봤다. 둘째언니가 직원이 내민 안내서의 사진들을 보며 방을 고르는 동안 큰언니가 내게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남자, 둘째가 바보라고 하니깐 고개 끄덕였지?” 나도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둘째언니가 고른 방은 ‘용궁’이었다. 4인용 방이었지만 남은 방이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4인용은 뭐야? 러브호텔은 2인용이면 충분한 거 아니야?” 내가 둘째언니한테 묻자 둘째언니는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에 대며 말했다. “쉿,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다고.” 나도 둘째언니처럼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대꾸했다. “쉿, 나도 알아.”

‘용궁’은 정말 용궁과 같은 모습으로 꾸며져 있었다. 거대한 조개껍질 안에 푹신한 매트리스가 깔려 있었고, 방 안은 온갖 해산물 모양의 장식들로 치장되어 있었다. 바닷속 분위기를 내기 위해 푸른색과 연보라색 조명도 빛났다. 가장 먼저 큰언니가 조개 침대 위로 뛰어들었고 그다음엔 둘째언니가, 마지막으로 내가 언니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침대에 누워 우리는 다함께 외쳤다. “우린 진짜 용궁에 왔다!”

우리 세 자매는 마치 바다에 잠겨 있는 기분을 만끽했다. 바다는 차가울 것만 같았는데 의외로 아늑했다. 문득 어머니가 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내 배 위에 양 손을 가지런히 겹쳐 올려놓았다. 예전에 어머니는 내게 용왕이나 거북이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 도망치라고 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가 없을 것 같다.

내 손 위로 큰언니와 둘째언니의 손이 겹쳐져 왔다. 나는 언니들의 손이 차가울 거라고 생각했다. 아까 집에서 방에 있는 나에게 라면을 먹이기 위해 끌어당겼던 그때의 감각처럼, 축축하고 미끄러운 지느러미와 같은 감각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행이었다. 여기 ‘용궁’에서의 언니들의 손은 더없이 따뜻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언니들의 푸근함을 느끼며, 나는 감겨드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가 내 간을 받고 다시 사나이 인생이 되면 어떡해?”

그러자 언니들이 센 힘으로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목소리로 큰언니가 말했다. “그러면 이번엔 우리가 도망가자. 그리고 어머니를 찾자.” 큰언니의 말에 나와 둘째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때는 꼭 도망칠 것이다.

목이 말라 눈을 뜨니, 언니들은 없었다. 어디선가 익숙한 소독약 냄새가 났다. 아니, 바다의 냄새인가. 나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문득 가리비 침대 곁에 무언가가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것을 알아챘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분명 거북이였다. 짙은 초록색의 길쭉한 얼굴에 까맣고 작은 눈. 토끼를 데려간 거북이는 언제나 망할 자식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보니 생각보다 서글픈 눈빛을 가진 녀석이었다.

“나를 데리러 온 거야?” 「응, 이제 가자.」

“그거, 아퍼?” 「괜찮아. 금방 나을 거야.」

“그렇구나. 그럼 됐어.” 「고마워.」

거북이가 고개를 숙였다. “아니야, 뭘.” 그런데 거북이는 계속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있었다. 그러자 나도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들면서 말했다. “알았어. 이제 됐으니 가자.” 그에 거북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검은 눈동자에서 초록빛의 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물은 내 눈가에도 흘러 축축하게 볼을 적시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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