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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통맥풍수] <57·끝>경주 최부잣집과 자기 풍수

입력 : 2007-12-29 10:08:07 수정 : 2007-12-29 1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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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총 태어난 안채에 정기석 모여 있어… 300년간 富 지켜내
◇경주 최부잣집 솟을대문. 12대 300여 년간 부를 지켜내며 벼슬은 진사 이상 하지 않았다.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해 부자의 도덕적 책임을 다했다.
하늘을 찌를 만한 권좌와 삼남 최고 갑부 자리를 눈앞에 두고 양자택일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취할 것인가.

경주 최부잣집은 권력보다는 돈을 택한 후 가진 자로서의 수범을 보였다. 그들은 12대 300여 년에 걸친 만석꾼의 부를 누려 오면서 결코 오만방자하거나 빈자들을 얕보지 않고 군림하지도 않았다. 돈으로 권력을 매수하려 들지 않았고 식솔들 모두가 검소와 절약으로 일관했다. 그러다가 부에 대한 사회적 개념을 일찌감치 터득하고 대대로 내려오던 재산은 물론 집마저 사회사업에 쾌척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자진 퇴장하였다. 그러고는 1950년대 보통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섞여 버렸다.

‘교동부잣집’으로도 불리는 최부잣집은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시 교동 69번지에 있다. 현재는 중요민속자료 제27호로 지정된 채 오가는 길손들을 맞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회적 지위에 걸맞은 도덕적 책임이 무엇인지를 묵언으로 대신하고 있다. 지금 최부잣집 후손들은 부자가 아니다. 선조들의 영화를 역사 속에 묻어 버리고 갑남을녀로 살아간다. 하지만 마음속 긍지는 시퍼렇게 살아 있다. 그래서 이곳에 들르는 과객들마다 가진 것에 대한 일말의 회의가 일면서 따끔한 경책(警策)을 얻어 간다고 한다.

진한(신라의 전신) 6부촌 중 하나였던 돌산고허촌의 대인 소벌도리를 득성조(得姓祖)로 하는 경주 최씨는 통일신라 진성여왕 때 천하제일 문장가로 중국에까지 문명을 떨친 고운 최치원(857∼?)을 시조로 한다. 고운의 17대 손인 정무공 최진립(1568∼1636)이 현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의 가암촌(佳巖村)에 정착하면서 가암파의 파조가 된다.
◇‘ㅁ’자 형으로 지어진 안집 산실. 원래 8채 99칸 규모였으나 현재는 3채만 남아 있다. 자좌오향의 정남향 동사택이다.

최부잣집이 부를 형성하게 되는 과정은 풍수지리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진립의 부친 신보(1531∼1577년)가 이조리에 살고 있는 참봉 황임종의 딸을 아내로 맞았는데 후사가 없던 황 참봉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일대에서 큰 부자였던 처가 재산을 모두 상속받게 된 것이다. 이후 부인 황씨가 죽자 인근의 강씨를 계실(繼室)로 들였는데, 강씨 장인 또한 막대한 재산을 남기고 후사 없이 죽어 버렸다. 진립은 그쪽 처가 재산까지 모조리 물려받아 창졸간 거부가 되어 버렸다는 가문 내력이다. 풍수에서 물길과 여자가 재물에 해당됨은 수없이 언급되고 있다.

이렇게 마련된 종자돈은 진립의 후손 동량-국선-의기를 거치면서 만석꾼의 부를 이루게 되는데 호사다마라 했던가. 후일 기영(1768∼1825)이 주위 형제와 사촌들의 시기, 해코지를 견디다 못해 현 교동 69번지로 이사 오면서 세칭 교촌파의 파조가 되는 것이다. 인근에 계림향교가 있어 교동 또는 교촌으로 불린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경주 최부잣집은 바로 이 교촌파다.

이번 최부잣집 취재는 포항시 흥해읍 승곡리에 살고 있는 무애(無涯) 박용환(朴龍煥·66) 선생의 동행취재로 이루어졌다. 무애는 땅속의 다양한 물질들이 생성해 내는 지하파장을 감지하여 명당 여부를 가려내는 자기(磁氣)풍수의 대가지만, 일반 법수·향법 풍수에도 능하다. 필자와는 작년 9월 1일 ‘대한민국 통맥풍수’가 연재되면서 인연돼 그동안 여러 차례의 현장답사와 이론학습을 통해 학문적 영역을 교환해 왔다.
◇반달형 모양의 안산. 달이 차면 기우는 법이어서 땅기운이 다하면 쇠락한다는 풍수지리적 물형이다.

“경주 지역의 풍수지리적 환경은 특이합니다. 백두대간이 낙동강을 따라 내려오다 이뤄놓은 낙동정맥과 낙남정맥에 둘러싸인 국세지요. 여기에 동악(토함산) 서악(선도산) 남악(남산) 북악(소금강산)이 자리하며, 낭산(朗山)은 중악에 해당됩니다. 북악이 쇠약하다 보니 내룡맥이 허합니다.”

비보풍수는 천년고도 경주에도 여지없이 적용되었다. 북악에 힘을 보태기 위해 산 이름을 소금강산이라 바꾸었다. 그래도 부족하다 여겨 시청 북쪽 황성공원에 인공산인 독산을 조성했다. 그러고는 이곳에 칼을 뽑아든 김유신 장군 동상이 북쪽을 향하도록 세워 놓았다는 것이 무애의 설명이다. 이러한 풍수원리의 지기 덕분으로 경주시가 융성하고 편안해진다면 누가 마다할 것인가.

기영-세린-만희-현식으로 만석꾼 지위를 탄탄하게 누려오던 최부잣집은 고운의 28세손 준(浚·1884∼1970)대에 이르러 모든 기득권을 홀가분히 털어 버린다. 일제 강점기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댔고, 이때 휘청해진 나머지 재산은 광복 이후 육영사업에 미련 없이 내놓는다. 현 영남대학교 전신인 대구대학과 청구대학 창설에 들어간 것이다. 가문 대대로 수집된 8900여 권의 고서도 함께 기증했다. 영남대에서는 그의 호인 문파(汶坡)를 따서 ‘문파문고’라 이름 지어 뜻을 기리고 있다.

“최부잣집 선조들은 풍수에 달통했던 어른들입니다. 보시다시피 후원의 내룡맥이 허약하잖아요. 집 뒤 향교보다 대문을 낮춘다며 파낸 흙으로 북현무쪽 용맥을 북돋우고 느티나무까지 심어 비보책을 강구했습니다. 경주지역이 분지라서 평지고분이 많은데 내룡맥이 없는 양택이나 음택은 장자가 대를 잇거나 가업 지켜 내기가 힘들지요.”
◇집 앞을 가로 지르는 남천. 재물이 쌓인다는 동출서류 지세로 물이 나가는 파구가 안 보인다.

좌향은 자좌오향으로 정남향의 동사택이다. 남쪽의 둥근 금체(金體) 안산 세 봉우리가 도당산과 대칭되면서 마치 노적봉과 창고인 양 서로 조응하고 있다. 동쪽 토함산에서 흘러온 물이 궁현수(弓玄水)로 감싸안으며 재물이 쌓인다는 동출서류(東出西流)인데, 물이 나가는 파구가 안 보인다. 풍수무전미(風水無全美)라 하여 흠결 없이 모두를 갖춘 땅은 없다 했던가. 대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내(內)안산이 집을 향해 반달 모양으로 휘어져 있다. 반달이 보름달이 되었다가 기울면 그곳에 의지했던 땅기운도 쇠하는 법-. 이것이 땅의 이치다.

무애는 그만의 비법으로 산출해낸 지하 정기석에서 지속적인 발복 원인을 찾고 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가 합방해 설총을 낳은 요석궁터에 자리한 최부잣집은 지을 당시 8채 99칸 규모의 대저택이었으나 현재는 세 채만 남아 있다. 특히 안채의 산실에 정기석이 모여 있어 300년 세월을 흔들림 없이 버텨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자기풍수는 황천살과 팔요풍을 중시하는 일반 풍수와 전혀 다른 접근 방식으로 이 지역 후학들에게 큰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무애는 지난 10여 년간 전국 각지를 수차례 일주하며 실사해 놓은 방대한 자료에 근거해 땅의 등급을 판정한다. 특급지(정기석의 혈폭 6.5m 이상)와 특해악지(정기석이 없고 수맥이 2라인 이상 있는 습지)를 포함해 1급 갑·을지∼9급 갑·을지까지 20등급으로 구분해 명당 여부를 가리고 있다. 최부잣집 산실의 지하 혈폭은 2m로 5급 갑지에 속하는 명당이다. 이 밖에도 왕릉, 시조 묘, 사찰, 재벌 생가, 각 시도 관청, 재벌그룹 사옥까지 면밀히 조사한 답사록을 갖고 있다. 풍수학계의 집중적 연구에 따라 놀랄 만한 성과가 기대되는 새로운 풍수학문이다.

경주 최부잣집의 여섯 가지 가훈은 너무나 유명하다. 거기에는 부를 지켜내는 지혜는 물론 세상 인심을 얻는 처세술까지 담겨져 있어 가진 자들의 사표로 제시되고 있다.

①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 것.진사는 조선시대 소과 중 진사과 급제자에게 주어지는 미관말직으로 주로 명예직이었다. 높은 벼슬에 있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정쟁에 휘말려 돈도 잃고 명예도 잃는다는 것이다. 최부잣집에서는 9대에 걸쳐 진사 벼슬까지만 했다.
◇자기(磁氣)풍수의 대가 박용환 선생이 최부잣집 쌀 창고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1000석을 저장할 수 있으며 개인집 창고로는 전국에서 가장 크다.

②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 것. 만석 이상의 소출이 나면 소작료를 받지 않거나 감면해 주었다. 그래서 이 지역 소작인들은 최부잣집이 논밭을 더 사거나 만석 이상 넘기기를 간절히 바라고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그래야 되돌아오는 것이 많았던 것이다.

③ 어떤 과객도 후하게 대접할 것. 옛날에는 과객이라 하여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그네가 며칠 혹은 몇 주일씩도 묵어갔다. 남루한 옷차림의 거지가 와도 차별 않고 상전 대하듯 했다. 팔도를 돌아다니며 들은 정보가 최부잣집에 다 쏟아졌다. 손님이 많을 때는 사랑채와 안채를 합쳐 100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④ 흉년에는 재산을 늘리지 말 것. 혹독한 가뭄이 들거나 재앙을 당하면 싼값에 땅을 팔려고 내놓는다. 남의 약점을 이용해 재산을 늘리려는 옹졸함을 경계했다.

⑤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을 것. 예나 지금이나 부잣집에 시집가는 것은 호강하기 위해서인데 최씨 가문에서는 검소와 절약부터 가르쳤다. 며느리들이 무명옷을 깁고 기워서 가마솥에 삶을 때 그 옷이 불어나 한 짐이 되었다고 한다.

⑥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할 것. 명색이 부자인데 굶어죽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세상 모두가 욕할 것을 알았던 것이다. 세상 인심이 이곳으로 모였다.

자손만대의 모범이 되고 있는 최부잣집 가훈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전국을 주유하며 떠돌던 어느 노(老)스님이 하룻밤을 묵고 아침 일찍 나서면서 최부자에게 이른 말이라고 한다.

“재물은 똥거름(糞尿)과 같은 것이어서 한 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서 견딜 수가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


◆ 경주 최부잣집의 여섯 가지 가훈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 것.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 것.
어떤 과객도 후하게 대접할 것.
흉년에는 재산을 늘리지 말 것.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을 것.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이가 없게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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