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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미의 살람, 중동] <26> 모로코 수도 라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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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빛 성벽 안 옛 ‘아랍의 도시’ 그대로
라마단 기간 낮엔 너무나 조용, 밤엔 북적…
‘중고품 천지’ 지생크시장서 만난 청각장애 소녀와 마음으로 대화
히잡 쓴 여인·민소매 여인 같이 활보…
알라 소리 들으며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 다양한 문화·인종·종교 서로 뒤엉켜
모로코 수도 라바트는 다른 나라들의 수도보다 훨씬 재미난 곳이다. 황토벽으로 된 성곽을 뜻하는 ‘메디나’를 비롯해 아랍인들이 예전에 만든 도시 형태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새로운 건물은 메디나 바깥에 지어져 있다. 메디나 안쪽으로는 대부분 시장이 형성되어 있고 사람들이 살고 있다.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면서 메디나 근처 호텔을 찾아다녔다. 유스호스텔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갔는데 그곳은 일주일 동안 공사를 한단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다니니 지칠 만도 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왔다. “모로코인의 친절에 넘어가지 말라”는 주의를 많이 들었기에 경계해야 했지만, 그럴 만한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호의를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호텔 두세 군데에 데려다 줬고, 나는 그중에서 적당한 곳을 찾았다. 가격 흥정도 잘 마쳤다.

짐을 풀어놓고 그와 함께 중동의 시장 ‘수크’를 구경하러 나갔다. 그때부터 다시 그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의심부터 시작했으니 그는 기분이 나쁠 만도 했다. 그러나 그도 알고 있었다. 그는 “모로코인들이 여행객을 상대로 많은 사건을 일으켜 왔으니 조심하라”면서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나의 오해였다는 게 다행이긴 했지만 그와 더 이상 동행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해한다”면서 “다음에 만나면 더 좋은 친구가 되자”고 말했다.

모로코 수도 라바트에 있는 황토빛 성벽 메디나. 새파란 하늘과 대조를 이뤄 신비롭게 아름답다.
혼자 저녁을 먹으러 간다. 라마단 기간이라 저녁이 돼야 식당에서 음식을 팔기 시작한다. 라마단은 지역마다 시간이 약간씩 다르다. ‘알라’의 소리가 울려퍼져야만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이곳은 그 소리가 오후 6시 반에 울려퍼진단다. 나는 6시에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시켜놓고 기다린다. 다른 사람들도 시켜놓고 밥 먹으라는 소리만 기다리고 있다. 6시 반이 되자 어김없이 울려퍼지는 알라의 소리와 함께 식사가 시작된다. 한 달이나 지속하는 이 라마단 기간에는 낮에는 음식을 먹지 않다가 저녁부터 먹기 시작한다. 그것이 아침이란다. 그래서 대부분 수프나 간단한 것을 먹고 오후 9시쯤 점심으로 푸짐한 먹을거리를 먹을 수 있단다. “그러면 저녁은 언제 먹느냐”고 물어보니 “오전 2시에 먹는다”는 답이 돌아온다. 정말로 새벽에는 시끌벅적하게 먹는 길거리 음식들이 줄지어 나왔다. 쳐다보기만 해도 먹어보라고 권하는 통에 금방 배가 불러온다. 구운 생선 꼬치, 수제 소시지, 갖가지 튀김과 아주 단 먹을거리들로 거리는 활기를 띤다. 반면 라마단 기간의 낮에는 조용한 수크를 볼 수 있다.

낮에 뭔가 먹을 것을 사놓지 않으면 먹을 게 없다. 그것도 숙소 안에서만 먹을 수 있다. 내가 묵은 숙소의 주인 아저씨는 “문도 걸어잠그고 먹어야 한다”고 주의를 줘 웃음이 났다. 외국인 여행자가 많은 다른 도시는 좀 다르겠지만 이곳 라바트는 여행객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철저히 현지인들의 생활방식 위주다. 그래서 이곳이 더 재미있는지도 모른다. 말이 잘 안 통하고 할 수 있는 것도 제한되어 있지만 그래도 나는 이런 곳이 더 재미있다. ‘지생크(G5)’라는 지역은 시장이 있는 곳인데 우범지대로 알려져 있다. ‘생크(cinq)’는 프랑스어로 숫자 5를 의미한다. 모로코에선 프랑스어와 스페인어가 흔히 쓰이지만 주된 공용어는 물론 아랍어다. 그러면서도 ‘베르베르인’의 언어가 남아 있는 곳이다. 북아프리카 원주민인 베르베르인은 아랍인에 의해 밀려나서 지금은 사막에 살고 있다.

우범지대로 알려진 지생크(G5) 시장의 풍경. 사람들이 쓰다가 내놓은 온갖 중고품이 가득하다.
지생크에 가기 위해서는 현지인과의 동행이 필요하다. 또 쨍쨍한 햇볕이 있는 낮 시간에만 가야 한다. 경찰이 있어 조금은 안심이 됐지만, 그래도 우범지대로 꼽힌다니 조심해야 한다. 그곳은 큰 시장이 열리는 곳으로 온갖 가게가 즐비하다. 재미난 이야깃거리와 구경거리가 쏟아져 나오는 곳이다. 흙항아리에 감각적인 색들을 칠해 팔고 있는 가게에서 차 한 잔을 마시고 나온다. 또 중고품 시장에서는 별의별 물건을 다 판다. 속옷부터 옷가지·양말·신발 등 죄다 누군가 쓰던 물건이다. 많은 사람이 그곳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그곳에서 말을 하지 못하는 스무살도 안 된 소녀 ‘도니아’를 만났다. 까만 피부에 예쁜 미소를 가진 도니아는 소리를 거의 내지 못했지만, 나는 그녀와 누구보다도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도니아는 나를 데리고 다니며 시장을 구경시켜줬고, 같이 사진을 찍으면서 돌아다녔다. 그녀의 말을 내가 알아듣고 나의 말을 그녀가 알아듣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이메일 주소를 적어주면서 자신은 말을 못하니 메일로 써 달라고 했다. 도니아의 가족을 만났다. 그녀의 어린 동생은 내 카메라에 큰 관심을 보였다. 꼬마는 내 손을 잡고 자신이 가리키는 것마다 다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찍으면 꼭 확인을 시켜줘야 했다. 꼬마는 자기가 아는 사람들은 전부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고, 그 사진을 보여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들과 헤어질 때쯤 도니아가 “까두(선물)”라면서 뭘 건넨다. 작은 종지 그릇인 ‘따진’ 두 개다. 내 주머니에 그들에게 줄 선물이 없다는 아쉬움에 포옹으로 그들과 인사를 하고 나왔다. 점심 때가 한참 지났으니 배가 고팠다. 음식을 팔 만한 가게들을 찾아 돌아다녔지만, 먹을 수 있는 건 음료수 한 잔뿐이었다. 그것도 큰 인심이나 쓰는 것처럼 가게 안 구석에서 마시라고 했다. 하필 라마단 기간에 이 나라를 여행하게 되다니!

지생크(G5) 시장에서 우연히 만나 친해진 소녀 도니아와 그녀의 동생. 도니아는 비록 말을 못하지만 밝게 웃는 모습만은 세상 어느 여인보다 아름답다.
시내버스를 타고 다시 메디나로 돌아온다. 시내버스는 보통 우리나라 승합차와 비슷한 크기다. 버스 노선은 정해져 있겠지만 정확한 건 알 수가 없다. 행선지를 얘기하면 태워줄지 안 태워줄지는 그들이 결정한다. 일반 크기의 버스도 다닌다. 어디로 가든지 대중교통은 잘되어 있다. 숙소 근처로 돌아오니 친근한 골목들과 친근해진 사람들이 인사를 건넨다. 고양이도 다가와 반겨준다. 모든 것들이 집 같이 느껴졌지만, 숙소에 들어가면 텅 빈 방이 다시 밖으로 나가게 한다. 메디나 끝으로 나가면 바다를 볼 수 있다. 그 근처 마을은 하얀색과 파란색이 적절히 칠해져 있다. 그건 마치 파란 바다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재현해놓은 것 같다. 도시의 바다라서 멋진 해변이나 멋진 바다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래도 차 한 잔 마시면서 보는 풍경으로는 괜찮다. 이곳에서 차는 ‘떼’라고 부른다. 떼를 마시면서 보는 바다는 처음엔 그냥 괜찮은 정도였는데 노을이 지기 시작하니 아름답고 눈부신 바다가 됐다. 자연이 그려놓은 그림을 보고 있으니 훌륭한 미술관이 된다. 스쳐 지나가는 이들도, 집들도 모든 것이 한 폭의 그림이다.

우연히 ‘아지즈’라는 남자와 친하게 됐다.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이리저리 헤치고 그의 집에 갔다. 저녁 파티에 오라고 초대하기에 “다시 이 길을 헤치고 찾아올 수 있다면 다시 오겠다”고 했다. 그는 파티 음식을 준비해야 했다. 나는 “마을을 더 구경하고 오겠다”고 말하곤 발걸음을 옮겼다. 그 미로 같은 마을에서 나는 아지즈의 집뿐만 아니라 나가는 길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에 갇힌 것마냥 헤매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나에게 구세주가 되어준 어떤 친구를 만났다. 그는 친절하게 메디나 입구까지 길을 안내해줬다. 아지즈의 집에 가야 한다고 하니 펄쩍 뛰면서 “아지즈는 위험한 사람이니까 가면 안 된다”고 말한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신기하게도 그때 아지즈가 나타났다. 두 남자는 나를 놓고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서로를 가리키며 나쁜 사람이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누가 나쁜 사람인지 알려면 나에게 나쁜 일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싸우는 둘을 버리고 숙소로 돌아왔다. 확실히 모로코인들의 호의는 조심해야 한다.

메디나 안은 편안하다. 이곳에는 관광객도 없고 호객행위도, 쓸데없는 호의도 없다. 모두가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는 곳이다. 모로코는 여전히 히잡을 쓴 아랍 여인이 다니고, 어디선가 민소매 옷을 입은 여자들이 활보하기도 한다. 유럽식 노천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면서 모스크의 알라 소리를 듣고, 얼굴은 백인인데 머리는 흑인처럼 곱슬곱슬한 사람을 볼 수도 있다. 여러 문화·종교·인종이 섞여서 융합되지 않은 채 뒤엉켜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독특한 문화를 만드는 ‘마로크’(Maroc·모로코의 프랑스어)와 ‘마로캥’(Marocan·모로코인)이다.

강주미 여행작가·‘중동을 여행하다’ 저자 grimi7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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