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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45>교토 신라神 제사 축제 ''기온마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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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07-11 12:11:00 수정 : 2007-07-11 12: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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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꾼들 구경꾼 향해 "왓쇼이 왓쇼이” 지금부터 1200년전 세워진 일본 왕도 헤이안경(794∼1869)은 오늘날 대도시 교토(京都)다. 해마다 7월이면 일본 교토 거리는 ‘기온마쓰리’(祇園祭·매년 7월17∼24일)라는 제사 축제 행사 준비로 한껏 술렁댄다. 교토 번화가인 산조(三條), 시조(四條)에서는 놋쇠로 만든 소형 징(鉦)을 울리는 제사음악(녹음)이 온종일 끊이지 않고 흐른다. 이는 아득한 옛날 신라로부터 배를 만들어 바다 건너 일본땅 이즈모(出雲)로 오셨다는 하늘나라 신(神)인 스사노오노미코토(素盞烏尊) (‘일본서기’)를 제사 모시는 신령(神靈)이 거리에 충만하고 있다는 신의 징(神鉦) 소리인 셈이다.

‘일본서기’에서 등장하는 스사노오노미코토는 신라신을 말한다. 스사노오노미코토는 신라 땅 우두산(牛頭山)으로부터 배를 만들어 동해 건너 이즈모 땅으로 온 일본의 개국신이다. 스사노오노미코토는 이즈모에 이르자 여덟 개의 머리가 달린 못된 뱀을 퇴치하고 어여쁜 ‘구시이나다히메(奇稻田姬)’를 뱀으로부터 구출해 아내로 삼은 영웅으로 칭송됐다. 우두산에 살아 고즈텐노(牛頭天王)로도 불린다.
도쿄대학의 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1839∼1931) 교수는 ‘일본고대사’(1907)에서 “스사노오노미코토는 신라신이다. 스사노오노미코토는 하늘나라 고천원(高天原)으로부터 지상으로 내려간 곳이 신라 땅 우두산(牛頭山)이며, 그곳에서 배를 만들어 바다 건너 이즈모 땅으로 건너왔다”고 적시했다. 구메 교수는 이 때문에 군국주의 일제 당국에 의해 대학 강단에서 추방되기에 이른다.
‘마쓰리(まつり)’는 하늘나라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축제이다.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며 농사와 장사가 잘되고 마을마다 모두들 건강하고 탈 없이 잘살게 해달라고 천신(天神)에게 빌고 제사 지낸 다음, 신령을 모신 가마와 수레를 몰고 마을 거리를 돌면서 뒤풀이 행진을 하는 것이 마쓰리의 근본 과정이다.
고쿠가쿠인대학 교수 가나자와 쇼사브로(金澤庄三郞 1872∼1967) 박사는 그의 저서 ‘고지린’(廣辭林·1925)에서 “마쓰리는 신을 받들어 봉사하면서 신의 영혼을 위안하고 기도하며 제사 지내는 여러 가지 의식을 통틀어 말한다”고 했다. 신사(사당)에서 신에게 제사 지내고 나서 신을 더욱 기쁘게 하기 위해 길거리로 나가서 많은 구경꾼들 앞으로 신명나게 행진하는 따위, 여러 가지 축제 행진 등 뒤풀이 행사를 갖는 게 마쓰리다.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초상화.(왼쪽)◇스사노오노미코토의 아내 구시이나다히메의 초상화.

마쓰리 행렬에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 ‘미코시’라고 부르는 가마 또는 수레이다. 고장에 따라서 미코시인 가마나 수레를 가리켜 ‘야마’ 또는 ‘다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가마 안에는 위패 등 신의 혼령을 모셨다. 미코시는 수십명의 가마꾼이 뭉쳐서 어깨에 둘러메거나 또는 큰 바퀴가 달린 수레를 앞에서 끌고 뒤에서 떠밀면서, 큰 거리를 행진한다. 이 때 가마꾼들은 거리 구경꾼들을 향해 “왓쇼이, 왓쇼이!” 하고 구령을 드높이 외치면서 행진한다.
시게카네 히로유키(重金碩之)씨는 “마쓰리에서는 가마꾼들이 ‘왓쇼이, 왓쇼이’(ワッショイ, ワッショイ) 하는 구령을 지르기 마련이다. 오늘날 이것이 전국적인 구령이 되었다. 이 ‘왓쇼이, 왓쇼이’는 고대 조선어로, ‘오셨다(おでになった)’는 의미라고 한다”(‘風習事典’ 啓明書房, 1978)고 지적했다. 고대 백제어(충청, 전라도 방언)인 ‘왔어이’ 또는 신라어(경상도 방언)의 ‘왔서예’가 구령화 과정에서 ‘왓쇼이’(ワッショイ)가 된 듯하다.
교토타치바나대학 사학과 이노쿠마 가네카쓰(猪熊兼勝) 교수는 지난 6월14일 오사카에서 필자에게 “현재 오사카에서는 해마다 11월3일, 백제 왕인 박사가 일본에 건너오신 것을 기념하는 ‘왕인마쓰리(王仁祭)’와 백제 불교가 일본에 건너온 것을 기념하는 ‘시덴노지 왓소 마쓰리(四天王寺ワッソ祭)’를 거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역시 ‘왓소’(ワッソ)는 고대 한국으로부터 왕인 박사의 문자문화가 왔다는 것이며, 백제 제26대 성왕(523∼554 재위)에 의해 불교문화가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설명이다.
◇임시로 마련된 야사카신사 본전. 건물 뒤쪽은 수리 중인 본전.

일본 3대 마쓰리는 교토의 ‘기온마쓰리’를 필두로 오사카의 ‘덴만텐진마쓰리’(天滿天神祭 7월25일), 도쿄의 ‘산자 마쓰리’(三社祭 5월16∼18일)이다. 이 중 기온마쓰리는 다른 어떤 마쓰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일본에서 규모가 가장 큰 제사 축제이다. 그다음이 ‘텐만텐진마쓰리이다. 이것은 ‘후나마쓰리(船祭)’라고도 하며 신령을 모신 선박을 수레 대신에 동원한다.
산자마쓰리는 아사쿠사(淺草) 지역의 큰 사당인 아사쿠사신사가 주관하는 마쓰리로 이름 높다. 마쓰리가 최초로 시작된 시기는 서기 749년이다. 그 당시 백제신인 하치만신(八幡神:백제인 오진왕의 신령)의 미코시(위패를 모신 가마)가 저 멀리 규슈로부터 나라 땅의 ‘도다이지’(東大寺)까지 행차한 일이 있다. 도다이지는 당시 백제인 행기 큰스님을 비롯하여 신라인 학승인 심상대덕, 백제인 양변승정, 이 세 성인(聖人) 큰스님의 주도로 서기 749년에 창건되었다.(연재 제35회 참조).
이미 7세기 중엽부터 신라신 스사노오노미코토를 신주로 모시고 제사드려 오고 있는 큰 사당이 교토 기온 거리의 ‘야사카신사(八坂神社)’이다. 야사카신사의 당초 이름은 ‘기온자(祇園社)’였다. 그러나 황국사관의 일제 치하가 되자 ‘기온자’ 칭호는 제거당하고 평범하게 ‘야사카(八坂)’라는 그 지역의 도로 지명으로 바뀌었다.
야사카신사는 7월에 접어들면서 매일 사당 신전에서 제사 등 온갖 ‘기온마쓰리’ 관련 행사로 분주하다. 일반인들에게 가장 큰 볼거리는 7월17일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신령을 모신 대형 수레 미코시 20대가 교토 시가지의 번화가를 누비는 가두 대행진일 것이다. 기온마쓰리는 미코시가 ‘야마(やま)’와 ‘호코(ほこ)’로 구별된다.
◇야사카신사 경내의 악왕자사당(惡王子社).

‘야마’는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신주를 모신 수레를 말하며, ‘호코’는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신령이 깃들인 드높은 신목(神木)을 우뚝 세운 수레를 일컫는다. 기온마쓰리에 등장하는야마는 모두 14대이고, 호코는 6대이다. 새벽부터 시조도리(四條通), 데라마치(寺町), 마쓰바라초(松原町) 같은 큰 거리로 나가야 행렬 앞쪽에서 지켜볼 수 있다.
고쿠가쿠인대학의 니시쓰노이 마사요시(西角井正慶 1900∼1971) 교수는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신통력으로 병마를 퇴치하기 위해서 처음 등장한 것이 기온마쓰리였다고 밝혔다. 그는 “기온마쓰리는 고래로 기온어령회(祇園御靈會)라고 불러왔다. 헤이안 시대(794∼1192)의 세이와 왕(淸和 858∼876 재위) 11년(869년)에 질병 퇴치를 위해 어령회(御靈會)를 연 것이 그 시초인 마쓰리로서, 일본의 여름 마쓰리의 형식을 생성한 원류가 되었다.
현재 전국 각지에서 ‘기온마쓰리’며 ‘고즈텐노사이(牛頭天王祭)’라고 호칭하는 마쓰리가 6, 7월 경에 행해져 미코시를 강가며 해변으로 둘러메고 가거나 수레가 달린 야마나 호코를 끌고 다니는 마쓰리가 허다한데, 그것은 거의 다 교토의 기온마쓰리의 영향을 입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年中行事辭典’ 1958)고 썼다.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신령이 깃들인 드높은 신목을 우뚝 세운 수레 ‘호코’는 우리나라 ‘강릉 단오제’ 때의 신목과 똑같은 양식이기도 하다. 즉 오늘의 교토 기온마쓰리의 제사 축제 양식이 우리 강릉단오제와 기원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강릉 땅에서 1000여년을 이어오며 역대 조선 왕조시대까지 음력 5월5일이면 강릉부 관아 주도로 거행돼 온 것이 ‘단오굿 제사’였다. 이것은 주로 관노들의 놀음으로 탈춤놀이(假面戱)를 행했다.
◇악왕자사당의 설명판에는 악왕자의 ‘악’이 ‘강력함’을 뜻한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메이지유신(1868) 이후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신라신 스사노오노미코토를 비하한 것이다.

강릉단오제의 본뜻은 대관령의 수호신인 산신(山神)을 위로하기 위한 강릉 관아가 주도하는 큰 연례 행사였다. 민속학자 최상수(崔常壽) 교수는 “해마다 음력 4월15일이면 강릉부에서는 호장(戶長)이 대관령 산 위에 있는 서낭사(城隍祠)에 올라가서 산신에게 먼저 굿제사의 거행을 말씀드려 고지한다. 이때 동원한 무당이 신나무(神木, 神靈樹)를 잡고 주문을 외워서 그 중에서 신들린 나무인 신대(神竿)를 받들어 올리면서 “국사(國師) 행차닷!” 하고 외치면서 앞장선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강릉 무당들이 열을 지어 뒤따르며 쇠와 장구를 치면서 행진하는데, 호장은 말을 타고 그들을 뒤따라간다. 이들의 떠들썩한 행렬이 들어서는 강릉부에서는 가마골까지 마중 나가고, 축제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이번에는 강릉부에 있는 서낭사에다 신대를 잘 모셔놓고 일단 모두 해산시킨다”고 단오제를 설명했다.
기온마쓰리도 그 과정이 강릉단오제와 매우 흡사하다. 기온마쓰리의 ‘호코’와 “왓쇼이, 왓쇼이”는 강릉단오제의 신목과 “국사행차닷” 하는 구령과 똑같다.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신주(神主)에 관해 야사카신사의 고문서 ‘유서기략(由緖記略)’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사이메이 왕(齊明, 655∼661 재위, 백제계 여왕 필자주) 2년(656년)에 고구려로부터 왜 왕실에 건너온 사신(調進副使)인 이리지(伊利之)가
◇홍윤기 한국외대 교수

신라국의 우두산에 계신 스사노오노미코토를 교토 땅(山城國八坂鄕)에 모시고 와서 제사드리게 되었다. 이리지는 왕실로부터 야사카노미야쓰코(八坂造)라는 성(姓)을 받았다.”
그 당시 신라는 제29대 무열왕(654∼661 재위) 때이고 고구려는 제28대 보장왕(642∼668 재위), 백제는 제31대 의자왕(641∼660 재위) 말기였다. 고구려 사신 이리지가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신주를 왜나라 야마시로(山城, 지금의 쿄토시 야사카신사) 터전으로 모셔 왔기에 “야사카신사를 고구려대사(高句麗大社)로도 부른다”고 일본 NHK방송은 1996년 5월 20일 보도했다. 고구려인 이리지에 의해 기온자(祇園社) 사당이 설 당시 이 터전에 세운 사찰은 호칸지(法觀寺)이며 그 당시의 오중탑(五重塔)의 모습이 지금도 남아 있는 옛날의 자취로서 14세기에 재건된 중요문화재이다. (다음주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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