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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 교수의 일본을 보면 한국이 보인다] 뿌리부터 잎사귀까지 전체주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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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1-06 17:46:29 수정 : 2010-01-06 17:4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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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방식으로 자라고, 교육받고, 삶 지속하는…
다름을 용납하지 않는 ‘끔찍한 사회’
장면 1.

1993년, 유럽 역사에 기념비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12개 국가를 주축으로 하는 단일유럽, 유럽연합(EU)이 탄생한 것이다. 서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1500년 만의 실질적인 재통합. 그런 EU의 탄생에는 독일의 참여가 결정적이었다. 경제력으로 보나 인구 수로 보나 유럽 최강국임에도 불구하고, 주변국들이 독일의 EU 가입을 반대할 경우에는 EU 자체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70년 전, 나치를 앞세워 프랑스, 폴란드, 네덜란드, 노르웨이 등 17개 유럽 국가들을 유린하고 유태인들을 600만명이나 학살했던 독일이 반세기 만에 EU 창설의 주역으로 초대받게 된 데는 남다른 노력이 있었다. 예를 들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내에서는 공식적인 졸업식이 사라졌다. 자칫, 권위주의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음악 시간의 합창마저 없어졌다. 물론, 운동회 같은 집단 행사도 폐지됐다. 그렇게 전체주의적으로 흐를 만한 행사들은 하나 둘씩 독일에서 자취를 감췄다.

장면 2.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을 얻어 맞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했다. 이후, 아시아의 스위스를 만들겠다는 맥아더 장군의 계획대로 일본은 농업 국가의 길을 조금씩 걸어나간다. 하지만, 이상(理想)도 잠시. 중국이 공산화되고 북한이 남침을 감행하면서 미국의 계획은 급격히 수정된다.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를 수상에 앉힘으로써 일본의 외교권과 군사권을 장악하고, 열도를 공산주의 방패막이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일본은 옛 제국주의 인사들이 국가 행정을 주무르기 시작하면서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장면 3. 

◇도쿄 이케부쿠로에 있는 란도세루 전문점의 내부 정경. 소학교 6년 동안 매고 등교해야만 하는 란도세루는 가죽으로 만든 까닭에 중고품은 2만∼3만엔 정도이며, 고급품은 10만엔을 훌쩍 넘는다.
일본 초등학교에 다니게 된 필자의 자녀들에게 ‘란도세루’를 들려 보냈다. 군용 배낭 비슷하게 생긴 란도세르는 일본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필수품. 어느 누구도 강요하지 않지만, 매지 않고는 등교하지 않을 수 없는 신물(神物) 중의 신물이다. 한국에서 가져온 가방을 들려 보내고 싶었지만, 학교 분위기는 도저히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후, 모든 학급 아이들에게 일괄적으로 나눠진 미술 도구 세트와 음악 도구 세트, 체육복 세트와 급식 세트는 모든 것이 획일화되고 정형화된 일본과 일본인을 좀 더 현실적으로 느끼게 해 주었다..

장면 4.

6개월이 지나자 웬만큼 일본을 알게 됐다고 자만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초대받은 초등학교 운동회. 한국에서도 큰 아이의 운동회를 보아온 지라 기대감에 들떠 학교로 향했다. 이후, 6시간 내내 이어진 충격과 당혹감. 운동회라기보다 거대한 집체극을 ‘시찰’하는 느낌이었다. 교장 선생님과 교직원들 앞에서의 엄숙한 선서 이후, 곧바로 이어진 학생들의 응원전에서는 군대를 방불케 하는 절도 있는 동작이 참여자와 참관자의 전투 의욕을 서서히 고조시켰다.

◇일본 소학교 운동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계체조. 10인 1조가 돼 인간 피라미드 쌓기를 연출하고 있다. 잘 훈련받은 군인들을 방불할 정도로 정교해 마치 거대한 집체극을 참관하는 기분이다.
놀라운 것은 각 학년들이 보여준 기계체조. 특히 5, 6학년의 경우에는 북한의 매스게임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3인 1조, 6인 1조, 10인 1조, 15인 1조가 돼서 만들어내는 각종 인간 피라미드 형상들은 ‘도대체 초등학교 운동회에 온 것이 맞나?’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필자를 더욱 놀라게 한 사실은 이날 진행된 수많은 행사들의 연계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고 매끄럽게 이어졌다는 것. 기계체조를 마치면, 100m 달리기로, 100m 달리기가 끝나면 줄다리기로 이어지는 과정은 톱니바퀴처럼 딱딱 들어맞았다. 얼마나 사전 준비를 철저히 했는지, 예행연습과 도상연습을 어찌나 많이 했는지, 100m 달리기를 하는 와중에 운동장 한쪽 구석에서는 선생님과 고학년들이 줄다리기 도구를 챙기고, 줄다리기가 끝나면 대기하고 있던 팀이 무섭게 줄을 걷어갔다. 군 부대에서도 소화해내기 힘든 완벽함. 운동회는 정확하게 3시에 끝났다.

운동회에서 받은 충격이 너무 컸기에 미국에서는 운동회를 ‘어떻게 하나?’ 인터넷을 뒤져 봤다. 그랬더니 하는 곳, 하지 않는 곳 등 제각각이기는 하나 운동회를 하는 학교들은 공통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즉, 학생들에게 사전 연습을 시키는 일 따윈 하지 않는다는 것. 심지어 어느 학교에서는 선생님에게 물풍선을 던지고, 즉석에서 신발 벗어 멀리 날리기 대회를 개최하는 등 그야말로 신나게 즐기다 돌아오는 가을날의 ‘축제’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운동회 준비로 매주 서너 번씩은 파김치가 돼 돌아오던 필자의 아이들이 머릿속에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일본 고등학교 학생들의 하교 모습. 새까만 교복에 가방까지 통일된 학교 생활을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교육받으며 자라기에 일본에서의 삶은 조직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철저히 인식된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중·고등학교에서 아직까지 교복을 입는 것하며, 입사(入社)하는 순간부터 남녀 모두 검은 양복과 검은 양장으로 출퇴근하는 일본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일용 노무자조차 ‘닛카폿카즈’라 불리는 일본 특유의 작업복을 맞춰 입고 작업 현장을 누비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규율과 획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은 이른바 젊은 세대들로 하여금 더욱 반항적으로 옷을 입도록 강제했다는 생각이다. 요란하고 정신 없는 옷으로 시내 한복판에서 내지르는 젊은이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은 그래서 더욱 안타깝게 다가온다. 

◇TV에 방영된 일본 회사의 면접 대기실. 모두 검은색 정장에 흰 와이셔츠와 블라우스를 입고 있다. 공산국가의 인민복 마냥 제복과 유니폼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게 일본인들의 숙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5년간의 실험 끝에 2007년 초라하게 막을 내린 ‘여유 교육’(유토리 교육) 프로젝트는 출발부터 실패가 내정됐던 ‘환상(幻想)’이었다. 창의적인 교육을 통해 일본을 바꿔보자는 의도에서 실시된 ‘유토리 교육’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금지와 통제, 훈련과 규율 속에 일생을 마쳐야 하는 동토(凍土)에서는 애당초, 발아(發芽)가 불가능한 씨앗이었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자라고, 같은 방식으로 교육받으며 같은 방식으로 삶을 지속해야만 하는 나라. 그런 일본은 뿌리부터 잎사귀까지 전체주의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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