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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량에게 가족을 주다

귀국하자마자 예술가로, 화가로 한창 주목을 받던 바로 이때, 위량은 판찬화에게 고향에 있는 아들 무얼을 상하이로 데려와서 함께 지내자고 부탁했다. 아주 어린 시절 이후로 가족다운 가족과 지낸 적이 거의 없던 위량은 가족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했다. 자신이 이처럼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판찬화라는 남편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와 가족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판찬화의 아들 무얼과의 생활을 통해 위량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엄마’ 노릇을 경험하며 여자로서 또 다른 행복을 느꼈다. 이 행복은 위량의 감수성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고 위량의 감정 변화는 작품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이 무렵 위량이 그린 <가족〉이라는 작품 속에는 이러한 행복이 담겨 있다.

위량의 또 다른 도전을 응원하다

1932년, 위량의 두 번째 개인전이 열렸다. 그녀의 전시회를 찾은 옛 은사 류하이쑤 교장은 위량의 그림이 뛰어나긴 하지만 개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스승의 비판을 받아들인 위량은 전통화가 짱다첸에게 그림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대학교수이자 최고의 작가로 선정된 유명 화가가 동년배 화가에게 배움을 청한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하지만 위량에게는 자존심보다는 배움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남들이 안 하는 일을 시작할 때는 언제나 그렇듯이 판찬화의 지지와 격려가 필요했다.

위량의 말을 들은 판찬화는 처음에는 펄펄 뛰었지만 이내 아내의 순수한 열정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판찬화의 허락에 용기를 얻은 위량은 타인의 비난이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짱다첸 같은 전통화의 대가를 비롯하여 수많은 은사들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배워나갔다.

영원한 이별로써 세상의 비난으로부터 보호하다

1936년 위량은 난징에서 총 네 번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난징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위량은 감당하기 힘든 사건을 겪게 되었다. 세 번째 전시가 열리던 첫날, 교육부장관 쉬에탕짜이가 구입한 대형 유화인 〈인력장사〉가 다음날 온통 찢어지는가 하면 ‘몸 파는 창녀가 나체화가가 되다’라고 쓴 전단지가 전시회장 곳곳에 나뒹굴고 있었다. 위량의 과거를 두고 계속되던 악의에 찬 조롱과 멸시가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었다.

이 무렵 위량은 판찬화와 그의 아들 무얼, 그리고 그의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다. 위량을 향한 적대감은 판찬화와 그의 가족에게도 고스란히 쏟아졌다. 공무원인 판찬화는 여러 단체와 기관으로부터 압력을 받아야 했고 다른 가족들은 사람들이 퍼붓는 악담을 매일같이 들어야 했다. 게다가 조강지처는 가족 내의 위계질서를 확고히 하고자 위량에게 권위를 내세웠다.

결국 위량은 다시 중국을 떠날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판찬화는 자신의 무력함을 통감하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위량의 선택을 받아들였다. 1937년, 마흔두 살의 위량은 생애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유럽으로 떠났다. 두 사람은 원치 않는 이별의 슬픔에 눈물을 흘렸다.

판찬화와 위량의 마지막

위량이 떠난 후 판찬화와 남은 가족들은 정치적인 혼란과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판찬화는 그곳에서 작은 학교를 설립하고 인재 양성에 힘썼다. 아들 무얼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유럽에 도착한 위량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중국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어느 화랑에도 소속되지 않고 후원자도 두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작품을 판매하여 생계를 꾸려나갔다. 심지어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때조차 다른 일을 하지 않은 채 오직 작품 판매 수입으로만 생활했다. 그러다 보니 늘 가난이 뒤따랐지만 중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위량은 오히려 살림이 늘어나는 것을 경계했다. 그렇게 20여년이 속절없이 흘렀다.

위량은 가족과 함께 고국에서 노년을 보내고 싶었으나 중국의 정세는 좋지 않았다. 1950년대 말, 이미 문화대혁명(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중국의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과 그의 아내 강청에 의해 주도된 극좌 사회주의 운동. 중국공산당 내부의 반대파들을 제거하는 수단으로서 당시 마오쩌둥에 반대하는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희생양이 되어 숙청되었다)의 조짐이 시작되어 위량의 은사였던 류하이쑤는 물론 아들 무얼조차 반동으로 몰려 머나먼 오지 지방으로 숙청된 상황이었던 것이다.

판찬화는 병석에 누운 몸으로 직접 편지를 써서 그녀의 귀국을 말렸다. 서양화가인 위량이 만약 귀국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했다. 판찬화의 편지를 받은 위량은 귀국의 꿈을 잠시 접어둔 채 화가로서 계속 활동했고 1959년, 파리에서 오르리에상을 수상한 위량은 자신의 작품 〈짱다첸 두상〉이 파리 현대미술관에 입성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해 여름, 판찬화는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판찬화는 행여 위량이 귀국할 것을 염려해 자신의 죽음을 그녀에게 알리지 말 것을 당부했다. 1년이 훨씬 지나서야 판찬화의 죽음을 알게 된 위량은 커다란 충격과 깊은 상심에 잠겨 모든 창작 활동을 중단했다. 판찬화가 세상을 떠난 뒤 위량은 이후 삶의 의욕을 잃고 건강이 크게 약해져 더 이상 작품 활동을 계속하지 못했다. 몇 년 후 위량은 프랑스 파리에서 홀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수십 년간 떨어져 지냈지만 판찬화는 위량의 하나뿐인 가족이자 변함없는 평생의 응원자이며 머나먼 프랑스에서 중국과 그녀를 연결해 주던 유일한 연결 고리였다. 또한 그는 그녀를 아내로 맞아 아끼고 사랑해 준 남편이었고 기꺼이 가족이 되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칼럼니스트 조민기 gorah9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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