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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원의 '밤의 대한민국']<11>서로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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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6-17 13:17:41 수정 : 2009-06-17 13: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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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지 마세요, 하흑!”

하지만 그는 아주 잠시 행동을 멈췄던 것뿐이었다. 나의 만류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날, 저녁. 난 처음으로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갑작스러운 비명에 그가 다시 입을 막아버렸다. 숨을 쉬지 못 할 만큼 강한 그의 손을 피하기 위해서는 입술을 꽉 깨물고 비명을 참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다른 여자아이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말리거나 소리치지 않았다. 아마도 공포였을 것이다.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는 힘없는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른 척 방관하는 일 뿐이었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그의 행위를 방해한다면 다음 표적은 자신이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행위가 멈춰지자 나의 첫 해방을 알리는 흥건한 피가 이불을 축축하게 저셨다. 그의 뱀 같은 눈이 만족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바지를 입고 방을 빠져나갔다.

그 때 나이 겨우 16살. 처음으로 남자의 손길을 느낀 나이치고는 조금 억울한 나이였다.

다음날 천이가 내 손을 잡고 물었다.

“누나 다리를 왜 절뚝거려? 다쳤어?”

해맑은 눈을 보고 있자니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그냥 위로를 받고 싶은 내 가슴속에 천이를 꼭 담아내는 일 빼고는…….

그의 손길은 점점 대담해져 갔다. 매일 밤 그의 입은 나의 가슴을 농락했고 사타구니는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치욕을 감당해야했다. 손장난과 함께 나의 입은 그의 더러운 것을 넣어야 했으며. 언제나 밤새도록 화장실에서 더러운 것을 닦아내야 했다. 그 누구도 이를 발설하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자살을 하고 사라진 뒤, 다른 여자아이들도 나와 같은 고통을 당해봤으면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조금씩 죽음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일이 벌어졌다.

어김없이 밤이 오자 나의 배에는 뱀 한 마리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 대담해진 그는 내가 신음을 참아낼 때면 더욱 세차게 사타구니를 공격해 왔다. 점점 더러운 손길의 시간은 길어졌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아픔에 몸은 너무나 쉽게 적응하고 있었다.

한참 절정을 치달리는 그의 숨소리가 들리는 찰나! 방문이 드르륵 열렸다. 천이가 잠에서 덜 깬 모습으로 눈을 비비며 다가왔다.

“누나, 나 오줌 쌌어.”

흐리멍덩하게 뜬 눈은 벌거벗은 그를 바라보는 순간 선명하게 모습을 담아내었다.

(짝!)

뜨거운 쾌락을 방해한 천이의 얼굴에 그의 손이 올라갔다.

“뭐야! 누가 들어오랬어! 당장 안 나가!”

쓰러진 천이가 뻘떡 일어나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더러운 살점이 다시 내 살을 뚫고 들어왔다. 아까의 절정을 빠르게 느끼고 싶었는지 살 속을 무참하게 헤집었다.

아픔을 겨우겨우 참아내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힘없이 눈을 뜨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왔다. 손에는 기다란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어둠속에서 그게 천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참 절정에 다다른 그가 날 와락 안았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천이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퍽!)

남자의 등에 천이가 가져온 둔탁한 물건이 세차게 닿았다. 나의 몸에 개처럼 달라붙어 있던 그가 떨어져 나가며 손으로 등을 만지려했다.

천이의 손짓은 계속되었다. 그의 얼굴과 가슴, 배와 어깨 등 사정을 두지 않고 미친 듯이 천이의 손이 휘둘려졌다. 맞는 부위의 통증이 컸는지 그의 손은 방어 하지 못하고 아픈 곳을 이리저리 만지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구름속의 가려졌던 달이 모습을 드러내자 창문으로 새하얀 빛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보였다. 피로 얼룩진 모습. 천이 피를 보자 더욱 흥분하며 있는 힘을 다해 몇 번 더 그를 가격했다.

다른 또래 아이들 보다 힘이 셌지만 너무나 대담한 행동이었다. 만약 그때 그가 쓰러지지 않았더라면 천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직까지 소름이 돋는다. 다행히 그는 정신을 잃고 내 가슴으로 쓰러졌다. 천이가 힘겹게 그를 밀어내고 내게 옷가지를 챙겨주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내 손을 잡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보육원을 빠져나와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나서도 멈추지 않았다. 점점 달리는 속도가 떨어져 갔다. 그런 와중에도 내 손을 잡은 힘은 줄어들지 않았다. 논과 밭을 지나 마을을 벗어나서도 힘없는 달리기는 계속되었다.

“됐어. 천아 이제 괜찮아.”

겨우겨우 차오르는 숨 사이로 말했다. 그제야 천이가 달리기를 멈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날 꼭 안아주며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그 뒤로 단 한 번도 천이의 눈물을 본적이 없다. 천이 나이 겨우 12살, 그 때부터였다. 우리의 삶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것은.

천이와 내가 보육원에서 나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잠잘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린 무작정 직업소개소를 찾아 먹고 잘 수 있는 숙소가 있는 일자리를 찾아 달라 부탁했다. 보육원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지역에서 일하게 해달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화류계 생활은 시작되었다. 바다가 있는 다방, 초라한 단칸방에서 우리는 처음 진짜 가족이 되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천이 14살이 되자, 고등학생만큼이나 건장한 신체를 자랑했다. 그런 모습에 난 너무나 흐뭇했다.

천이는 다방 오토맨을 하겠다며 일자리를 찾았다. 한사코 말렸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렇게 일을 시작한 천은 건달 사장의 눈에 띄어 처음 조직생활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천이가 사장의 눈에 들려 노력을 했는지도 모른다. 항상 가게에 붙어있으며 빠르게 일을 배워 나갔다. 아가씨들도 알차게 관리했고 가게 매상에 있어서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천이는 아무것도 없는 우리가 살아가려면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지 그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사건이 있기 한 달 전, 범휘가 날 찾아왔다. 근심 가득한 그의 모습에 직감적으로 무언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님. 형석 형님께서 천이형님 작업하려고 합니다.”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했던 내게 그의 말은 별로 충격적이지 않았다.

“왜? 형석이가 천이 생활 시켰잖아. 그런데 갑자기 무슨 말이야?”

침착하게 또박또박 말을 하자 범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아마도 내가 매우 당황할 거라 생각 했었나보다. 내가 담담하게 받아들이자 말을 가리지 않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분당에 와서 형석형님께서 천이 형님께 감정 상할 일이 많이 있었어요. 형석형님이 시작하신 일들은 전부 어려워지고 단속도 심해지는데 천이 형님 일은 꽤 잘됐잖아요. 그래서 형석형님께서 천이 형님께 돈을 좀 가져다 쓰신 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식구끼리 이자 한 푼 깎아주지 않고 다 받아내셨어요. 그리고 제때 이자를 입금 받지 못할 때는 형석 형님 오락실 까지 찾아가서 거의 강제적으로 매상을 가지고 오셨던 적도 있거든요. 형석 형님 입장에서는 동생들에게 완전 가우 떨어지는 일이지요.”

범휘도 은근히 천이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날 찾아왔다는 것은 천이를 배신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뜻했다.

“천이를 작업하면서 지금 천이가 하고 있는 사업들 모두 자신이 하겠다는 거지? 그럼 천이와 형석의 공존은 있을 수 없는 건가?”

나의 말에 범휘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형석형님 따르는 식구들은 결정내고 날짜만 기다리고 있어요. 누님도 아시잖아요. 형님께서 동생들 잘 챙겨주시지 못하는 거. 동생들 대부분이 형석형님 말에 동의하고 준비하고 있어요. 저 역시 오늘 불려가서 직접 애기들은 겁니다. 저까지 포섭하려고 한 것을 보면 이미 준비 다 끝난 거예요. 천이형님 빠진 자리에 대신 장사 할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니까 어쩔 수 없이 포섭한 걸 거예요. 그리고 제 밑에 아우들이 꽤 많으니 신경 쓰지 안 쓸 수 없었겠죠.”

“날 찾아온 것은 천이를 살려낼 수 있는 방법도 있으니 왔겠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핵심을 꺼냈다. 범휘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지요. 형석형님 먼저 작업하는 거. 그것뿐입니다.”

당당하고 자신 있는 말투. 꽤 믿음이 갔다. 하지만 정확한 확신이 필요했다.

“자신 있는 거야? 뒤탈이 없어야 될 텐데”

“걱정 마세요. 모두 별 탈 없이 진행 할 수 있으니까요. 대신 앞방 설 사람이 필요합니다. 워낙 술과 계집을 좋아하는 인간이니 쉽게 걸려들 겁니다. 술에 약을 좀 타서 기절시킨 다음 2차나가는 아가씨가 직접 형석형님을 처리해야 합니다. 시체 처리는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그리고 석천형님 뒤 따르던 놈들도 제가 처리할게요. 천이형님을 따르는 아우들이 거의 없어서 제가 일단은 앞방서서 막아야 하니까요. 그런데 누님께서 직접 나서서 하시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세요. 이번 일은 천이 형님 몰래 처리해야 되요. 그리고 중간에서 누님의 역할이 가장 중요해요. 형님이 나서지 못하게 해주셔야 되니까요. 형님이 알게 되신다면 전면전을 하시려고 하실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키워온 사업 모두 공중분해 되는 건 시간문제예요. 또 제가 아닌 형님이 선두에서 아우들 지휘하게 되면 불만이 많이 쌓일 겁니다.”

일리 있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희생을 감수하면서 일을 처리 할 사람이 마땅치가 않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생각을 하나하나 정리해 보기 시작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끝까지 책임을 질 수 있는 두 사람이 생각났다. 세인과 아영이었다.

사람이란 참 간사한 동물이다. 자신의 이익과 안위를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희생에 무감각해진다.

범휘를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궁금해 미치겠다는 그의 표정이 나의 대답을 애타게 기다렸다.

“범휘야. 내가 계획을 짜 볼 테니까. 며칠 안으로 다시 애기하자. 일단 오늘은 그만 돌아가.”

금방이라도 나에게 방도가 나올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이 묻어 나왔다.

범휘가 돌아가고 난 곰곰이 생각을 했다. 여러 가지 상황을 조합하고 결론을 내리기까지 갈등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계획의 정리가 끝나자마자 세인을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 방금 전 범휘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그녀도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번일, 아영에게 시켜 볼까해.”

“아영이에게?”

자신에게 일을 맡기려 하는지 알았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사실. 아영이와 너, 둘 중에 확률을 따지자면 네가 좋겠지. 하지만 그 이후에 천이가 감당해야 하는 어떠한 힘겨움도 남겨주고 싶지 않아. 모든 일은 철저하게 비밀로 해야 돼. 죽을 때까지. 아마 아영이에게 선택의 자유는 없을 거야. 어떻게 해서든 이번 일을 하지 않고서는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들 테니까.”

천이가 사랑하는 여자를 절벽으로 내몰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세인을 사랑하는 천이를 보며 탐탁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왜 하필 우리와 같이 더러운 물을 먹고 살아가는 그녀여야 하는지 답답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그 둘의 사랑에 인연의 고리는 나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분명 그러했다. 그렇기에 그 둘을 인정하는 것이 부정하는 것보다는 덜 힘든 일이었으리라.

둘의 관계를 인정하니 섭섭함과 고마움이 함께 찾아오는 미묘한 감정도 생겨났다.

세인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죽는다. 참 영화 같지 않아? 그런데 현실에서도 영화 같이 아름다울까? 아니. 더러운 시궁창 같을 거야. 그래도 해야 하겠지? 도망치고 싶어도 할 수 밖에 없을 거야. 솔직히 일이 틀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그래야 아영이 한 사람 만으로 우리가 행복해 질 수 있을 테니까. 만약, 일이 틀어지게 된다고 해도 걱정하지 마.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다음 타자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세인의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난 강하게 부정했다.

“널 위한 것도,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야. 난 내 동생이 아파하거나 위험하거나 힘들어 하는 게 싫을 뿐이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절대 네가 나설 일은 없을 거야. 내가 꼭 그렇게 만들 테니까.”

내 계획은 착오 없이 잘 풀려갔다.

아영을 불러 그녀에게 가장 절실한 것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순순히 나의 말을 따라주었다.

혹여나 갑작스레 일이 틀어 질것을 걱정하여 난 항상 아영을 곁에 두었다. 사건 당일 날 까지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이었을까? 나의 예상은 빚나갔다. 계획대로 아영이 올라갔지만 결정적인 순간 그녀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도 내심 기대하며 모텔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지만 끝내 나오지 않았다. 가게에 안에 있던 세인이도 시간이 지나자 초조한지 밖으로 나와 날 찾았다.

“언니, 아직 이야?”

“아무래도 실패한 거 같아. 내가 올라가야겠어. 곧 약에서 깨어날 거야.”

여기서 수를 쓰지 않으면 안됐다. 실패는 곧 천이의 불행을 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안위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모텔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세인이 내 팔을 붙잡았다.

“언니, 말했잖아. 다음 타자가 있다고, 내가 갈게.”

장난기 서린 말투와 웃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여유였다. 하지만 그 여유는 억지스러운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내 팔을 꽉 움켜진 그녀의 팔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 만약 이번 사건이 천이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천이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너 뿐이야. 잘못되면 둘이 여기서 떠나. 나중 일은 범휘가 알아서 할 거야. 알겠어?”

난 급하게 소리치며 세인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팔을 놓지 않았다.

“지금 뭐하는 거야? 장난하는 것 같아? 여기서 그 새끼 끝내지 않으면 안 돼! 지금 곧 있으면 깨어나게 될 거라고!”

좀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한 짜증을 석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팔은 내 손에서 떨어질지 모르고 있었다.

“유세인! 지금.......”

더욱 거센 말을 하려던 나의 입은 세인의 목소리에 저지당했다.

“똑바로 들어! 나 지금 이러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니야. 알아? 지금 나도 도망치고 싶어. 내가 왜 이렇게 미친 짓거리를 해야 하는지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해도 내가 해! 네가 천이를 생각하는 만큼 나도 그를 생각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내가 해야 돼! 천이와 언니! 지금 이 둘의 사이가 정상이라고 생각해? 천이와 서연수 두 사람이 정말 가족이라 생각해서 이러는 거야? 착각하지 마! 웃기는 개소리 하지 말라고! 서연수와 정천! 당신 둘은!”

세인의 말이 들려오는 내내 나의 가슴은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마치 그녀에게 나의 알몸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마지막 말이 끝까지 이어졌더라면 아마도 나의 손은 그녀의 뺨을 향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녀는 말을 중간에 끊었다.

내가 멍해진 틈을 타 세인이 날 밀쳐내고 급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제지 할 수 있는 시간은 충분했다. 하지만 난 그녀를 잡지 않았다.

차라리 그녀가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녀의 마지막말에 대한 대답은 영원히 세상으로 나와서는 안 되는 말이었기에.

얼마 뒤, 아영이 급하게 뛰쳐나왔다. 그녀를 붙잡았지만, 나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 모습에 하나의 시나리오가 내 머리를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세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완벽한 시나리오.

내 잘못이 아니다. 이 모든 잔인한 계획은 세인의 한마디 말실수 때문이다. 난 정말 그녀를 보호하려 했다. 그리고 둘의 행복을 위하여 큰 희생을 혼자 감당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 손길을 뿌리친 것은 바로 그녀였다. 내안에 깊숙이 감춰져 있던 감정, 평생을 나 자신도 모른 채 숨겨야 했던 감정을 그녀가 끄집어낸 것이었다. 절대 세상에 나오면 안 되는, 영원히 단단한 자물쇠로 가둬 놓아야하는 사........랑.

며칠 후 세인은 우리 집을 찾아왔다. 드디어 계획한 일을 실행에 옮길 차례였다.

계획은 간단했다. 그냥 아영에게 전화만 걸면 되는 일이었다.

예상대로 경찰이 우리 집에 들이 닥쳤다. 잠들어 있던 세인이 벌떡 일어나 경찰들을 경계했다. 경찰이 조금씩 그녀를 에워싸며 포위망을 좁혀갔다. 분명 지금 쯤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두려움이 극에 달했을 것이다. 난 살며시 찬바람이 들어오도록 베란다의 창문을 열었다. 어찌 할 줄 모르고 두리번거리던 세인은 바람이 느껴지자 정신없이 바람이 부는 쪽으로 뛰쳐나갔다. 어찌나 빠른지 누구도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바로 옆에 있었던 나조차도.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누구도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경찰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가장 가까웠던 내가 먼저 조사를 받게 되었다. 천이와 다른 이들을 끌어들여서 좋을 것이 없었다. CCTV에 찍힌 아영에 대한 물음부터 시작 되었다. 난 세인과 죽은 남자가 연인 사이었고 다른 아가씨와 2차를 나간 남자에게 화가 난 세인이 아영을 쫒아내고 남자를 죽였다는 말을 그럴싸하게 꾸며내었다. 천운이었던지 목격자 까지 나타났다. 뭐라 이야기 하는지 잘 듣지는 못했지만 모텔 입구에서 세인과 내가 싸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며 진술 했다. 경찰은 별 의심 없이 내 손을 들어줬고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약속대로 범휘는 석천을 추종하는 식구들을 모두 타진하고 천의 안전을 지켜주었다.

난 아영과 범휘를 언제나 곁에 두었다. 공통된 비밀에 대한 동질의식으로 죄책감을 나눠가짐으로서 서로가 큰 짐을 덜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린 서로가 잘 지내는 듯 했다. 모든 과거를 잊어버린 듯 아영과 나는 급속히 친해졌다. 범휘도 아무렇지 않게 천이와 열심히 사업을 꾸려나갔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서로 꼭꼭 숨겨두었던 상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곯아 썩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이상 스스로의 위로로는 해결 될 수 없을 만큼 서로가 지쳐버렸다.

위로는 면역이 되어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지만, 과거의 기억은 좀처럼 면역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조용한 정선의 밤이 너무나 아름답다.

오늘 하루만큼은 세인이, 그녀를 위해 슬퍼해줘야겠다.

@박범휘.

한 사람을 맹목적으로 신뢰 할 수 있다는 것이 가능 한 걸까?

천이형님과 연수누님을 봐오면서 지금까지 가져왔던 의문이다.

우리들의 첫 기억은 우리 고향 다방에서부터 시작 되었다. 당시 형님은 오토맨으로 있었고, 난 일찍이 생활을 시작했었다.

형님이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꼬마들의 반발이 거세었다. 타지 사람, 그것도 오토맨으로 있던 형님을 모셔야 된다는 것에 꼬마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또래 중 가장 일찍 생활을 했던 나의 입김은 확실하게 형님의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나 역시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어린나이에 형님이라 불러야 하는 사람이 오토맨 출신이라니.

이 모든 것은 연수누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네가 범휘지? 천이가 내 동생인데 잘 부탁할게.”

형님이 생활을 시작한다는 소식에 형석형님에게 따지려고 다방으로 찾아갔던 날, 그녀를 만났다.

마른체격에 긴 생머리, 다방 아가씨답지 않게 단정하고 서울아가씨와 같은 뽀얀 피부. 어린 내가 처음으로 보는 아름다움이란 단어가 걸맞은 여자였다. 형석형님 아가씨 중 꽤 예쁜 아가씨가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었는데 바로 그녀가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한동안 그녀를 무의식 속에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 내게 그녀가 담배를 한 갑 쥐어주었다.

“타지라서 많이 힘들 거야. 범휘라는 이름이 꽤 유명하던데 앞으로 우리 천이 좀 잘 부탁할게. 대신 담배는 걱정하지 마. 내가 매일 사다 줄 테니까.”

사실 난 담배를 태우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보기 위해 담배를 배워야 했다. 그렇게 그녀와의 계약은 담배 한 값으로 시작이 되었다.

그녀는 매일 내게 담배를 사다 주었고, 난 계약에 충실했다. 심지어 형님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거나 반발하는 또래나 동생들을 조직에서 제명시키기도 했다.

형님은 영리한 머리로 선배들에게 인정받게 되었다. 난 그런 형님의 뒤를 언제나 그림자처럼 보호해야했다. 선배들에게는 꽤 똘진 동생으로 인정받았지만, 그럴수록 또래나 동생들에게는 시기의 대상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형님은 늦게 생활을 시작한 탓인지 조직의 생리를 잘 모르고 있었다.

건달에겐 따르는 동생의 숫자가 중요하다. 돈으로 따르게 하느냐, 무력으로 따르게 하느냐, 의리로 따르게 하느냐는 선택이지만, 어떠한 선택이던 간에 동생들이 많아야 자신의 안전과 세력을 보존 할 수 있는 것이다.

형님의 그러한 부족한 부분은 내가 대신 채워나갔다. 형님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을 무시하는 동생들을 언제나 처리하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중요성을. 그래서인지 형님은 동생들을 만나는 자리나 또래를 만나는 자리에 항상 날 동행시켰다.

형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녀를 볼 수 있는 기회도 자주 생겨났다. 그렇게 우리 셋이 어울리는 경우가 잦아졌다. 그리고 그녀가 형님을 생각하는 만큼 언젠가 나에게도 그런 관심을 줄 거라는 기대감도 부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형님과 그녀 사이에는 내가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깊은 감정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형님이 다방 일을 마치고 날 찾았다.

“아우. 우리 바람이나 좀 쐬러 갔다가 올까? 아우랑 단둘이 가고 싶은데.”

내가 승낙하리라 생각했는지 손에는 기차표 두 장이 들려있었다. 늦은 저녁 우린 기차에 몸을 실었다. 오랜 시간을 달린 끝에 처음으로 와보는 한 시골마을에 다다랐다.

“형님 이곳에 무슨 일이 십니까요?”

더 이상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형님에게 물었다. 하지만 무섭게 굳어버린 형님의 얼굴은 대화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냥, 따라와 줄래? 아무 말 하지 말고.”

형님이 목적지에 도착 할 때 까지 그저 이리저리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택시를 타고 가야할 것 같은 거리를 계속 걷기만 하였다. 무슨 일인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형님의 얼굴은 악몽을 꾸는 사람처럼 변해갔다. 식은땀이 눈에 보일정도로 흘러내렸다. 두 손은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쥐어져 있었으며 입술은 얼마나 세계 깨물었는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천천히 걸었음에도 갈증을 느끼며 물을 찾고 싶어지는 순간, 학교와 같이 생긴 건물 앞에 도착을 하였다.

길게 숨을 고른 형님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이곳이 형과 연수누나가 자란 곳이야. 어때? 멋지지?”

웃으며 이야기 했지만 그 모습은 울상이었다. 난 그런 형님의 비유를 맞추려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예 형님. 멋진 곳입니다요.”

어두워진 그 곳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말에 억지스러움을 느꼈는지 형님이 말했다.

“아우는 눈이 좋네. 그래. 정말 멋진 곳이지. 그 인간만 없었더라면.”

형님의 말에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형님의 행동이 더 이상의 대화를 용납하지 않았다.

형님은 문이 아닌 담벼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난 아무 말 없이 뒤를 따랐다. 형님이 주위를 살피고 단 번에 담벼락을 넘어갔다. 나 역시 같은 행동으로 담벼락을 넘었다.

직감적으로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을 느꼈다. 숨을 죽이고 형님을 따라갔다.

넓은 운동장과 함께 큰 규모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기숙사 같아 보였다. 바로 옆에는 조그마한 가정집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형님은 가정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주먹보다 조금 큰 돌멩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순간적인 판단이 형님을 말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하지만 내 머리는 호기심을 만들어 내며 양심의 소리를 짓밟았다. 지금 상황이 그녀와 연관이 있을 거란 예감 때문이었다. 그녀와 함께 살았던 장소라 하지 않았던가!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허름한 집안은 도둑도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다. 거실로 들어가자 여러 개의 방문이 보였다. 형님은 자연스럽게 어둠속에서도 헤매지 않고 구석에 위치한 방문을 정확하게 열었다.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눈에 훤하게 보이고 있었다. 방안엔 머리가 훌러덩 벗겨진 중년의 사내가 코를 골며 잠을 청하고 있었다. 형님은 주워온 돌멩이를 손안 가득 쥐었다. 난 방안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았다.

범보다 빠른 행동으로 자고 있던 사내의 배에 올라탄 형님이 그의 입을 가로막았다. 정신이 든 사내가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형님의 손이 더 빨리 움직였다. 돌멩이를 쥔 손이 있는 힘껏 사내의 얼굴을 내리 찍었다. 돌에 살점이 한가득 뜯겨져 나왔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형님의 손 밖으로 새어 나왔다. 생각보다 큰 신음소리에 난 급하게 수건을 찾아 형님에게 던졌다. 수건이 사내의 입안에 물렸다. 얼마나 가득 물렸는지 사내는 숨쉬기조차 곤란한 모습이었다.

완벽하게 신음이 봉쇄당하자 형님의 손은 사정을 두지 않았다. 얼굴을 감싸고 있는 사내의 손을 상관하지 않고 거침없이 돌멩이로 얼굴을 찍어 내렸다. 처음 몇 번은 손등이 방어를 해주었다. 하지만 점점 손목이 얼굴을 감쌌고, 또 조금 지나자 양손의 팔꿈치가 위아래로 겹쳐지며 얼굴을 보호했다. 형님은 팔꿈치 뼈를 부러뜨리려는지 더욱 세차게 공격을 퍼부었다. 한 번, 두 번, 팔꿈치는 점점 제 모습을 잃어갔다. 이내 팔은 정상 팔이라면 꺾일 수 없는 각도로 늘어졌다. 지금까지 팔에 가려졌던 사내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숨이 무척이나 가쁜지 코를 심하게 벌렁거렸다. 형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아! 하아! 이봐 내가 누군지 알겠어? 나 5년 전에 이곳에 살았던 사람인데. 헤헤. 오랜만이야. 정말 너무 오랜만이야. 안 그래? 반갑지 않아?”

형님의 말에 사내는 공포영화에서 귀신을 본 주인공처럼 얼굴이 변해갔다. 새어나오지도 못하는 신음이 고함으로 변했다. 누군가가 간절히 듣길 원했겠지만 아쉽게도 그 소리는 방 밖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하하! 이제 기억이 좀 나? 네가 망쳐놓은 어린 소년과 네가 더럽혀버린 어린 소녀가 이제 좀 떠오르나보지?”

소름끼치는 웃음. 형님의 손은 다시 사내의 얼굴을 가격하기 위해 천천히 위로 솟았다. 놀이공원에서 타는 청룡열차와 같은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천천히 올라간 손이 내려올 때에는 엄청난 속도와 함께 긴장감을 만들어 냈다.

사내의 얼굴에선 잘 여물은 여드름 여러 개가 한꺼번에 터지듯이 피가 솟구쳐 올라왔다. 튀어 오른 피는 형님의 얼굴에 잔뜩 뿌려졌다. 형님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도 남을 만큼 많은 양이었다.

사내의 한쪽 얼굴은 멀리서 봐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내려앉아있었다. 뜯겨진 살점은 이리저리 방안 군데군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까진 숨이 붙어있었다.

“평생 이런 날이 올지 몰랐겠지? 지금은 누구에게 그 더러운 욕정을 해결하고 있어? 어떤 아이 몸을 더듬고 있냐고.”

형님의 이야기에 그녀에게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 쉽게 짐작이 갔다. 처음에는 너무 잔인하다 생각되었던 형님의 행동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통쾌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난, 사내의 마지막을 무덤덤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사내의 얼굴을 내리 칠수록 함몰되어가는 곳이 많아졌다. 코가 없어지고 이마, 광대뼈, 머리통까지. 그러나 숨은 쉽게 끓어지지 않았다. 눈빛도 여전히 삶에 미련이 있는지 공포를 담아내고 있었다.

“얼마나 개지랄을 했으면 숨도 쉽게 안 끓어지냐. 다 니 복이다.”

형님이 농담까지 해가며 그를 농락했다. 손은 쉬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드디어 숨소리가 조금씩 작아지기 시작했다.

모든 행위가 끝나자 형님은 아무 말 없이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집안은 피 비린내가 진동했다.

난 황급히 다른 방을 돌아다니며 옷가지를 찾아 화장실 문을 노크했다.

“형님. 옷가지와 수건 앞에 있습니다요. 갈아입으시기 바랍니다요.”

난 심호흡을 크게 하고 사내가 죽어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시체를 처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육중한 사내를 옮길 수도 없었고, 방안 가득한 피를 모두 닦아 낼 수도 없었다. 그제야 형님이 날 왜 여기가지 데리고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시체처리의 버거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거실로 나와 주위를 뱅뱅 돌며 방법을 생각해봤다.

‘움직일 수 없으면 이 자리에서 없애버리면 되는 거잖아.’

나도 모르게 손뼉을 마주쳤다. 정신없이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일 먼저 가스레인지가 눈에 들어왔다. 제대로 작동을 하는지 불을 켜보았다.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것이 확인되자 서둘러 온 방안의 창문이 굳게 닫혀있는지 확인했다. 쌀쌀한 날씨 탓인지 창문은 보온을 위해 완벽하게 밖의 공기를 차단하고 있었다. 난 가위를 찾아 가스밸브를 잘라버렸다. 가스 냄새가 잘라진 호스를 통해 확 올라왔다. 때마침 형님이 화장실에서 나와 옷을 주워 입었다. 형님이 코를 킁킁 거렸다.

“가스야?”

“예 형님. 서두르시기 바랍니다요. 시간이 없습니다요.

형님과 나는 재빨리 현관을 빠져나와 가스가 집안을 가득 메울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님이 멍하니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 빛 조차 없는 지독한 밤이었다.

“비밀, 지켜 줄 거지?”

느닷없는 질문이 던져졌다. 난 고민 없이 대답했다.

“예, 형님. 걱정 마십시오. 누님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돌 던질래? 아니면 담배 던질래?”

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형님이 농담을 던졌다.

“제가 돌 던지겠습니다요.”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받으며 돌멩이를 하나 주워들었다. 동시에 형님이 담배를 한 대 깊숙이 빨아들였다.

“휴~ 하나, 둘, 셋!”

형님의 신호와 동시에 내가먼저 창문을 향해 돌멩이를 던졌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거실 창문이 깨졌다. 바로 뒤를 이어 형님이 던진 담배는 집에 닿기도 전에 큰 폭발음을 내었다.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뜀박질을 하기 시작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끝도 없이 달렸다. 그녀 때문이었을까?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한참 동안 계속되던 달리기는 불길이 눈에 보이지 않자 멈춰졌다. 축축한 땀으로 젖은 옷 때문에 온 몸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터벅터벅 걸으며 형님이 말했다.

“내가 꼭 누나를 위해서 해야 했던 일이야.”

형님의 말에 난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감상적인 감정은 저만치 사라지고 있었다. 형님과 그녀 사이에 내가 끼어들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 그 누구의 간섭도 용납하지 않는 그 둘만의 지독한 이기주의.

사건이 있기 며칠 전 형석형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앞뒤 다 잘라먹고 가게로 와보라는 이야기만 툭 던져졌다. 하는 수 없이 다음 이야기는 발을 직접 움직여 들어야 했다.

오락실은 영업을 하지 않는지 모든 기계의 전원이 꺼져있었다. 기다란 복도를 빠르게 지나 사무실에 들어서자 여러 또래 친구들과 아우들이 답답할 정도 가득 앉아있었다.

“쉬셨으까 형님.”

형석형님은 그 사이에 앉아있었다. 난 깍듯이 인사를 하고 조심스럽게 상황을 살폈다. 모두가 날 주목하고 있었다. 등줄기가 오싹해 질정도로 살벌한 기운이 맴돌았다.

몇 주 만에 만났는데 안부의 말도 없이 본론이 이어졌다.

“형, 이번에 천이 작업한다.”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내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상황은 이미 파악이 되었다. 다만, 형석형님에게 어떠한 말로 기분을 맞춰야 할지를 잠시 망설였던 것뿐이었다. 여기서 내가 수틀린 말을 한다면, 걸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형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따르것습니다요.”

형석형님은 다른 건달들과 달랐다. 어떻게 해야 이 바닥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맹수가 야생에서 오랫동안 살아남기 위해서는 먹이사슬의 관계에 충실하고 정글의 법칙을 철저하게 지켜야한다. 건달세계에서 바로 그런 맹수가 형석형님이었다.

그에게 배신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건달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평범한 진리였지만 의리라는 명목으로 신뢰를 지키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의리를 지키는 부류는 건달 생활의 수명이 너무나 짧다.

“하하.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형이 우리 범휘아우를 얼마나 예뻐했는데.”

건달 생활에 잔뼈가 굵은 나에게 별다른 의심은 없었다. 의리라는 명목에 목숨을 걸 정도로 내가 아둔하지 않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변수를 생각하지 못했다. 바로 그녀라는 치명적인 나의 약점.

그곳에서 안전하게 빠져나오자 그녀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천이형님을 걱정하는 마음은 내 가슴에서 찾아 볼 수 없었다. 오직 그녀에게 이 사실을 한시라도 빨리 알려 나라는 존재가 천이형님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각인 시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분당으로 오고 나서부터 그녀는 더 이상 내게 담배를 사주지 않았다.

다시 담배를 매일 같이 받을 수 있다는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사건당일.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모텔 입구에 그녀가 나와 있었다. 손에는 담배 한 갑이 들려있었다. 예상대로 담배는 내 손에 쥐어졌다.

“이번 일. 잘 좀 부탁할게.”

“걱정 마세요. 누님. 일단 자리 피하세요. 알리바이는 확실하게 만들어 놓으셔야죠. 시체는 제가 확실하게 처리 하겠습니다.”

그녀는 불안한지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안심시키는 내 자신이 너무나 뿌듯했다.

“누님. 여기 계시면 위험해요. 걱정하지 마시고 오랜만에 일찍 퇴근하세요. 조금 있다가 연락드릴게 소주나 한 잔 사주 세요.”

마지못해 그녀가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불안함을 내비쳤다. 난 그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어서가라는 손짓을 계속해야만 했다.

일처리는 내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한 번의 경험이 있는 나이지 않은가! 완벽한 처리를 해보았기에 이 번 만큼도 자신이 있었다.

헬멧을 쓰고 지저분한 점퍼 차림으로 옥상에 올라갔다. 며칠 전 배달해 놓은 LPG가스통과 긴 호스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단단히 몸을 로프에 고정하고 호스에 가스통을 연결했다. 그러자 호스를 통해 가스가 새어 나왔다. 조심스럽게 벽을 타고 시체가 있는 방으로 내려갔다. 창문을 부수고 들어간 방에는 오래전 상황과 비슷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난 익숙하게 깨진 창문을 이불로 봉쇄했다. 그리고 호스를 시체 옆에 두고 태연하게 현관으로 빠져나왔다. 이제 가스냄새가 새어나올 때까지 문 앞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좁은 방안이라 그런지 순식간에 헬멧을 뚫고 가스냄새가 전해져왔다.

복도를 걸어 나가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예전에 천이 형님이 했던 대로 정확히 가스가 새어나오는 문 앞에 꽁초를 던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큰 폭발이 일어났다. 안전거리를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휘청거렸다. 사방은 화재를 알리는 경보 소리로 요란했다. 정신없이 다른 방에서 사랑을 나누던 사람들이 뛰쳐나와 주위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난 그들과 섞여 천천히 건물을 빠져나왔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진짜 중요한 일이 남아있었다. 바로 증거 인멸이었다. 가스통 처리가 급했다. 다음 날이면 분명 가스통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제 3의 인물을 추적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난 서둘러 건물 뒤편에 주차시킨 차로 달려가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었다. 그리고 다시 모텔 안으로 들어가려했다. 이미 경찰들이 와있었다. 난 흥분을 한 척 연기를 하며 그들을 뚫고 들어가려했다.

“놔! 여기 형님이 계신다고! 나 좀 놔봐!”

경찰 세 명을 가볍게 제압하고 재빨리 건물로 뛰어 올라갔다. 날 붙잡으러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재빨리 연기를 뚫고 옥상으로 가야했다. 건물 건체를 삼켜버리고도 남을 만큼의 연기가 날 가로막았다. 주머니에 고이 들어있는 담뱃갑을 만져보았다. 그리고 허파에 공기를 가득 넣고 옥상으로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건물은 총 7층 높이였다. 중간에 숨이 너무 차올라 다시 들여 마신 숨에 지독한 유독가스가 전해졌다. 머리가 띵하고 울리며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죽음 힘을 다해야했다. 다시 그녀를 웃는 모습으로 볼 수 있으려면.

정신력 때문이었을까? 정신이 몽롱해진 상태에서 겨우 옥상에 다다를 수 있었다. 눈과 코에서는 사정없이 액체들이 흘러 나왔다. 난 그것들을 닦을 새도 없이 서둘러 가스통을 찾았다. 폭발로 인하여 가스통은 저 멀리 날아가 볼품없이 쓰러져있었다.

난 가스를 모두 쏟아내어 가벼워진 가스통을 번쩍 들고 건물 뒤쪽으로 향했다. 건물 바로 아래에는 미리준비 해놓은 커다란 트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정확하게 가스통을 차에 떨어트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트럭 짐칸에 가스통이 정확히 떨어졌다.

모든 마무리가 끝나자 건물 앞쪽으로 달려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소방관이 날 발견하고는 사다리를 통해 구출을 해주었다. 난 가슴이 답답하다며 숨을 헐떡거렸다. 소방관들은 내가 유독가스에 중독 됐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구급차가 날 병원으로 이송했다. 기절한 척 하며 동생에게 문자를 보냈다.

(주차장 청소 좀 해라.)

병원으로 옮겨지고 얼마 뒤, 문자가 전해져 왔다.

(청소 마쳤습니다.)

계획은 완벽했다. 응급실 밖으로 나와 그녀가 준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약속을 지켰으니 이 담배와의 계약은 이루어 진 것이다. 수년 만에 피워보는 담배였다. 머리가 핑하니 돌며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그녀가 담배를 사다주지 않은 그 날부터 지독하게 담배를 끓었었다.

“20번은 그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너무나 좋다. 이 씁쓸함만 빼면.”

@곽창석

고향에서 형이 모든 것을 버리고 분당으로 올라오게 된 것은 모두가 나 때문이었다.

형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모든 것을 내게 대리만족 하려 했다. 어린 시절 돌아가신 부모님은 내 기억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도 없었다. 형은 항상 나의 가슴이 부족함을 느끼기 전에 모든 것을 채워 주었기 때문이다. 고향에서 부족함 없이 풍족하게 살아 갈 수 있었던 것도 형의 희생 때문이었다. 중학교도 가지 않은 형이 선택한 길은 주먹을 쓰는 일이었다. 여러 번 교도소를 들락거려야 했지만 그럴수록 형의 입지는 더욱 굳혀져갔다.

그렇게 애써 일궈놓은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유는 내가 대학을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형 밑에 있던 많은 사람들도 분당으로 터전을 옮겨와야만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형이 이곳에 자리를 잡는 다는 것이 쉽지 만은 않았던 것 같다. 형은 언제나 이리저리 돈을 구하러 다녔고, 늦은 밤, 술에 취해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난 형에게 차라리 다시 고향에 내려가 새롭게 시작하라고 말했지만 그때마다 형의 말은 한결 같았다.

“내게 유일한 혈육은 너 뿐이야. 그런데 어떻게 내가 널 혼자 보내? 형이 정상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가능했겠지만, 형이 이 자리까지 오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를 봐왔는지 모를 거야. 그렇기에 네 안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절대 용납 할 수 없어. 널 위한 게 아니야. 내 자신을 위한 선택이야. 그리고 어차피 그 좁은 시골 바닥에서는 한정된 수입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돼. 지금은 조금 힘들더라도 조금씩 괜찮아 질 거야.”

하지만 형의 이야기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이곳 건달들과 마찰도 꽤 많은 것 같았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많은 빚을 졌는지 전화 통화를 할 때면 항상 불편한 심기를 들어냈다.

“이봐. 아우, 자네 돈을 안 갚는다는 게 아니잖아. 아우가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할 수 있나? 아우를 이 만큼 자리 잡게 해준 게 누군데. 정말 형 이렇게 서운하게 대접할 거야!”

그리고 돈을 빌린 사람과는 갈등이 많아보였다.

“이봐 아우! 우린 건달이지 사업가가 아니야! 건달 자존심까지 버려가면서 그렇게 장사해야겠어? 아무리 타 지역 와서 장사하고 있지만 우린 호남식구야! 동생들 밥벌이 챙겨 줄 생각은 하지도 않고 오히려 여기 식구 새끼들에게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챙겨준다고?...... 이 새끼야, 친목 봉투가 보호비가 아니고 도대체 뭐야! 동생들과 우리 조직 식구들이 자네를 보호해주지 다른 식구들이 자네를 보호해 주는 거 아니야! 지금 아우들은 굶어 죽게 생겼는데 니까짓거 하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되고, 조직 타이틀 팔아서 이 지역새끼들 하고 붙어먹어도 된다는 거야! 네 녀석이 그렇게 행동하고 다니니까 저 새끼들이 우리 식구 애들한테 장사 못하게 방해하는 거 아니야! 네 녀석에게 돈 받은 버릇이 있으니 우리에게 돈 내고 장사 하라는 거 아니냐고! 건달이 장사하는데 돈 먹일 곳은 공권력 하나뿐이야! 네까짓 것이 지금 우리 조직 완전히 망가뜨리겠다는 거야 뭐야! 처음 길을 잘 못들이니까 계속 일이 커지는 거 아니냐고! 다른 말 할 필요 없어! 앞으로 이 지역 새끼들하고 무조건 전쟁이야! 애들 몇 명이 징역 가든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전쟁이라고!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든 것은 네 녀석이니까 네가 앞방서서서 일처리 해!”

그러면서도 그 사람에게 더 많은 돈을 빌렸는지 통화를 할 때마다 돈의 액수는 불어나 있었다.

새벽이나 아침에 들어오는 형의 얼굴에는 상처가 점점 많아졌다. 그리고 형을 믿고 고향에서 부터 따라온 사람들이 집까지 찾아오는 경우가 눈에 띄게 늘었다.

“형석형님,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우리 식구 모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야 합니다요.”

답답함을 호소하는 사내의 말에 형이 말했다.

“어찌되든 여기서 쇼부를 봐야 갰지. 정천 그 새끼는 어떻게 하고 있어?”

“어제 오락실 찾아와서 이자 명목으로 돈 긁어가고 말입니다요. 천이형님, 솔직히 이 쪽 식구들하고 전쟁하실 마음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요. 이미 이곳에 자리 잡은 상태이지 않습니까요. 형님들, 동생들 다 죽어 가는데 혼자 잘 살고 계십니다요.”

“마지막 방법이야. 우리가 살길은. 나가면서 이야기 하지.”

형은 급하게 옷을 차려입고 사내와 함께 나갔다. 텅 빈 집안에 혼자 있던 내게 불길한 예감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직감은 점차 확신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런 형을 바라보고 있는 일 외에는…….

사건이 있기 며칠 전, 우리 집은 하루에도 수십 명의 사내가 정신없이 들락거렸다. 모두 같이 살기를 띈 얼굴과 함께 눈매가 무섭게 번뜩였다.

그리고 사건 바로 전 날, 형이 내게 다정하게 말했다.

“형이 요새 많이 힘들었는데,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형 때문에 계속 잠도 못자고 네가 고생이겠다. 며칠 안에 사업도 많이 확장 될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형한테 언제든지 말해.”

하지만 사건 당일, 형을 대신하는 한통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경찰이 수사에 나섰지만 범인은 이미 자살을 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누구도 형의 죽음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마도 누군가의 보복을 두려워했었던 것 같다.

형의 장례식은 너무나 외로웠다. 함께 고향에서 올라온 사내들 중 몇몇만이 장례식장을 지켜주었다. 그러나 그들도 누군가의 눈을 의식했는지 새벽 늦게야 찾아와 이른 새벽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라는 두려움과 외로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쉽게 느낄 수 없는 지독하고 잔인한 공포이다. 형이 떠나고 누군가를 원망할 시간도 없이 난 홀로 힘겨운 일어서기를 해야만 했다.

홀로 남겨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장 생활부터 어려워 졌다. 월세 보증금을 빼어 허름한 여인숙에서 연명해야 했다.

누구하나 내게 연락을 해오지도 않았고 그야 말로 정말 나 혼자였다. 내 유일한 가족이 떠난 그 자리가 너무나 두려웠다. 하루에도 몇 번을 PC방과 여인숙을 오고 갔다. 주식은 라면이 되었다. 고향으로 내려갈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친척하나 없는 내게 그곳 역시 이곳과 비슷하리란 생각을 하게 했다. 누구하나 의지 할 곳이 없자, 어쩌면 정말 이대로 노숙자로 전략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숨이 턱! 막혀왔다. 살기위한 몸부림이었을까? 갓난아이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미의 젖을 찾듯, 나도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형이 고향에서 게임 아이템을 사고파는 장사를 했던 것이 불현듯 생각났다. 여러 컴퓨터로 게임을 하면서 게임에서 쓰이는 아이템이나 돈을 모아 파는 일이었는데, 꽤 수입이 되었었다. 난 여러 사이트를 통해 가장 인기 있는 게임을 알아냈다. 그리고 게임을 한 두 시간 해보니 어느 정도 룰이 파악이 되었다. 하지만 당장에 팔수 있는 아이템이나 게임상 돈은 내게 있지 않았다.

그렇게 절망감이 밀려오는 가운데 나의 첫 사기는 시작되었다.

아이템 거래를 할 땐, 돈이 먼저 입금 되고 아이템을 거래하는 것인 일반화된 거래방법이었다. 그렇기에 입금만 확인되면 아이템이나 게임머니를 주지 않고 컴퓨터를 꺼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현금을 입금시키기 전 내가 거래 할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럴 땐  현란한 말솜씨가 필요했다.

아이템을 시세보다 조금 싸게 판다는 문구를 채팅창에 띄우자 여러 사람이 몰려들었다. 그 중 한사람을 선택하여 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아이템 확인하게 먼저 보여주세요.)

(님, 아이템 거래가 불법이라 걸리면 제 캐릭이 이용중지가 될 수 있어요. 대신 핸드폰 번호와 집 주소 알려드리고 집 전화번호까지 알려드릴게요.)

능숙하게 채팅을 이어갔다. PC방 공중전화는 대부분 받는 전화도 가능한 것들이 많이 있었다. 난 그 번호를 집 전화인양 알려주었다. 그리고 내 핸드폰 번호도 알려주었다. 예상대로 전화는 PC방 공중전화로 걸려왔다. 난 수화기 주위를 손으로 감싼 다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이템 거래 때문에 전화 드렸어요.”

“아! 예! 저희 집인 거 확인하셨죠? 걱정 마시고 거래하셔도 돼요,”

“그래요. 그럼 계좌번호 좀 주세요.”

그렇게 내 첫 사기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때 처음 입금된 돈은 5만원, 난 하루에도 수 십 번씩 PC방을 옮겨 다니며 온라인 사기를 치기 시작했다. 큰돈이 들어오는 거래는 하지 않았다. 소액만을 목표로 하였다. 큰 액수의 경우 경찰에 신고 될 확률이 높았고, 직접 만나 거래를 하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소액은 귀찮아서 신고를 하지 않거나 계좌이체로 거래를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많게는 50만원 적게는 20만 원 정도의 돈이 매일 같이 들어왔다. 하지만 건수가 많아질수록 불안해져 갔다. 언젠가는 덜미를 잡힐 것이 분명했다. 난 인터넷으로 대포통장과 대포 폰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30만원을 주고 통장과 대포폰을 구입하였다. 신분노출의 염려가 없자 안심하고 마음껏 사기를 치기 시작하였다. 대담하게도 큰 액수의 사기까지 손을 대었다.

“우리 만나서 거래 합시다. 아무래도 거래가 꽤 크니 안전하게 해요.”

“님, 게임 상으로 이렇게 거래하는 것도 창피하군요. 저 나이도 많고 요즘 만나서 거래를 하게 되면 강도들도 많다고 하는데 불안합니다. 대신 제가 통장 복사본과 주민등록증을 스캔해서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럼 믿으시겠죠?”

대포통장 구입 시 통장 명의자의 신분증 카피 본을 주었다. 사람들은 신분증과 통장의 명의가 일치하면 대부분 잘 믿어 주었다.

큰 액수의 돈이 들어오니 조그마한 월세 방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온라인 사기를 치며 연명한지도 6개월이 지나갔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했던가? 앞뒤 가리지 않고 무섭게 사기를 치던 난, PC방에서 현장 검거되었다. 같은 아이디를 사용했던 것이 실수였다. 수많은 고소장이 내 아이디로 신고 되었던 것이다.

경찰서에서 난 아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사실대로 이야기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 사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와 난 운이 좋았는지 구치소로 이감되어서도 함께 방을 쓸 수 있었다.

구치소에서 장 사장과 함께 경제사범들이 지내는 방에 수감이 되었다. 그곳에서 난 전문 사기꾼의 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판사인양 내 형량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합의만 잘 하면 집행유예로 빠질 거라며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사기 기술과 함께 안에서 먹고 지내는 것에 부족함이 없도록 많은 신경을 써주었다.

그들이 내게 이렇듯 잘 해주는 이유는 사회에서 자신들의 심부름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40일 후, 난 그들의 판결대로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내가 출소하는 날, 여러 사기꾼들이 내게 얼마의 돈을 쥐어주었다. 약속대로 난 밖에서 그들의 심부름을 해주며 조금씩 일을 배워 나갔다.

대포차를 파는 사람도 있었고, 다단계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중국에서 공장을 차려 고의 부도를 낸 사람도 있었고, 부동산을 허위로 매매하여 단단히 한 몫 챙긴 사람도 있었다.

심부름을 해나가면서 이론상으로는 복잡했던 사기 행각들이 점점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가리가 커지자 그들에게 점수를 매기기 시작했다. 당연 장 사장에게 가장 높은 점수가 매겨졌다.

장 사장은 손대지 않는 일이 없었다. 대포차부터, 은행 사기까지, 그러면서도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회장님이라 부르며 존경했다. 그에게 사기를 당했으면서도 아직도 그를 믿고 따르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시답지 않은 사기꾼과 확연한 레벨 차이를 보인 것은 다른 면에서였다.

장 사장은 자신을 변호하는 변호사까지 완벽하게 가지고 놀았다. 그는 변호사에게 조건부 약속을 했다. 천만 원을 일단 미리 줄 터이니, 자신의 조건에 맞는 형량이 나오면 1억 추가, 그 보다 더욱 좋은 성과를 내면 3억을 준다는 말로 변호사를 현혹했다.

장 사장은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닌 변호사의 노력 덕분에 1년의 형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장 사장은 약속과는 달리 단 돈 십 원 한 장도 변호사에게 지급하지 않았다. 이유인 즉, 변호사는 법으로 조건부 변호를 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건이 끝남과 동시에 그 돈을 주는 것은 장 사장의 마음대로였던 것이다.

사기를 치려면 법에도 빠삭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장 사장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장 사장이 출소하는 날. 난 교도소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출소 시간보다 조금 늦게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난 그에게 두부를 내밀었다.

“뭐야? 자네 나 기다린 건가?”

두부도 받지 않고 날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난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예. 사장님.”

“뭐? 사장님? 하하! 기본 마인드는 됐구먼."

웃음이 터진 그의 모습에 모든 게 잘 풀릴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난 즉각 담배를 손가락에 끼워주며 조심스럽게 불을 붙였다.

“유현진, 실장. 오늘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할 거야.”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그가 내게 신분증을 하나 건네며 말했다. 안에는 유현진 이라는 이름이 뚜렷하게 박혀있었다.

“사진은 지금 당장 가서 자네 것으로 덮어버리자고.”

난 별 미련 없이 유현진이란 인물의 삶을 받아들였다. 내겐 더 이상 곽창석이란 이름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곽창석은 사라졌다.

그냥 좋게 생각하고 싶었다.

내가 다시 곽창석이란 이름을 찾게 되는 순간은 풍족한 삶과 함께 날 기억해주는 이들이 많이 생겨날 것이라는 행복한 생각.

소설가  sojj12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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